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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공동생활의 질서”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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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인 학교에 관한 기억을 더듬기 위해 1970년대 생들의 사진첩을 열어본다. 70년대 생들의 학교생활은 70년대에서 90년대 사이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과 함께 기억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7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중고등학교 때는 전두환 대통령과 88년 서울올림픽, 89년 전교조, 90년대 대학교에 다닐 때는 김영삼 대통령과 문민정부의 출현, 서태지와 아이들, 신세대 담론, 그리고 1995년 삼풍백화점의 붕괴 등이 우선 열거할 수 있는 주요한 사건들이다. 70년대 생들에게 학교에 관한 기억은 대부분 이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여 현상된다. 정이현은 “제도 교육 과정으로부터 밀려난” 1995년을 같은 해에 일어난 삼풍백화점의 붕괴 현장과 함께 적는다. 거기에서 다시 “1995년으로부터 약 이십여 년 전”, “제도 교육의 장에 진입한” 때를 추억한다. 동네 어린이집을 방문했을 때 원장은 다음과 같은 “저주”를 남긴다. “똑같은 꿈에서 깨어나 똑같은 모양의 가방을 메고 똑같은 시간에 등교하여 똑같은 노래와 율동을 배운 다음 똑같은 메뉴의 간식을 먹는 것.”(정이현, 「삼풍백화점」) 원장에게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란 공동의 질서를 제대로 익혀 모두 똑같아지는 만드는 것이다. 학교는 “위대한 공동생활의 질서”를 가르쳐 “똑같은”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훈련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가 마을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있었다. 독재자 ‘박통의 죽음’은 이기호의 「백미러 사나이」의 주인공 이시봉의 뒤통수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박통의 죽음으로 인해 비관한 아버지가 내던진 재떨이에서 깨진 유리 파편 두 조각이 아들 시봉의 뒤통수에 박혀 두 개의 구멍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생긴 “두 개의 구멍”을 시봉은 “박통의 눈”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생 시봉에게 닥친 심각한 과제는, “박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도, 계엄령의 발동과 그에 따른 통행금지 시간의 확대도, 박 대통령 사후 권력 지형의 급격한 변화도 아닌, 한글 맞춤법에 대한 명쾌한 이해와 활용이었다.” 받아쓰기 시험 시간에, 박통의 눈은 빛을 발한다. 그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박 대통령이 힘겹게 다시 뜬 눈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뒷자리 반장의 답안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반장의 답안지 속 글자들을 제 답안지에 옮겨 적기(아니,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연필을 쥔 손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글자를 옮겨 적는 덴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그저 박 대통령이 보는 세상을 기록할 뿐이라고. 그날 받아쓰기 시험에서 그는 당당히 구십 점을 획득했다. 그가 틀린 문제는 ‘햇살’ 하나에 불과했다.(안타깝게도 그에겐 지우개가 없었다) 선생님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상기된 얼굴로 ‘하면 된다’를 연속해서 외쳤고, 친구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그는 조금 우쭐한 심정이 되었다.(이기호, 「백미러 사나이」) 시봉은 반장의 답안지를 본 것이 아니라 “박통의 눈”으로 “박통이 보는 세상”을 적었을 뿐이다. 시봉의 기록 능력을 더욱 부추긴 것은 ‘하면 된다’를 외쳤던 선생님이다. 이후, 시봉은 뒤통수에 박 대통령의 눈을 지닌 덕분에 학교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시봉이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어떻게 다녔는지를 여기에서 샅샅이 열거할 생각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뒷걸음질치고 있는 사내. 앞을 등진 채 앞을 향해 뛰고 있는 사내. 그가 바로 그다.”(「백미러 사나이」) 우리가 ‘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앞을 등진 채 앞을 향해 뛰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김종광의 <<야살쟁이록>>(1,2권)은 1987~89년 사이 한 고등학교 교실의 시끌벅적한 풍경으로 초대한다. 혼주고 1학년 7반의 학급실록과, 주인공 다현과 친구들이 만든 문집 <<야살쟁이>>에 실린 이야기가 그 중심 내용이다. 문집 <<야살쟁이>>에는 농민들을 해미들판에서 쫓아낸 기업의 횡포, 5공화국의 비리와 광주 청문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한 ‘고삐리들’의 되바라진 생각들이 듬뿍 실려 있다. 아이들은 교육민주화선언 1주년 기념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가는 ‘문제스승파’ 담임 우장훈을 만나면서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은 역사를 공부하게 된다. 다음은 ‘국사, 마지막 단원’을 배우는 장면이다. 교사: 71년에 태어난 너희들은 무슨 근거로 경제가 성장했다고 믿고 있는 걸까? 너희들은 세뇌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 하지만 내가 봐도 우리나라가 먹고살 만해진 것은 분명한 듯하다. (…) 문제는 이런 것이다. 꼭 박정희였어야만 경제가 발전했을까? 박정희가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누가 대통령이었더라도 우리 국민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 그런 것이라면 박정희 정권은 과오가 너무 많다. 굴욕적인 한일 수교, 베트남 파병,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베트남 정글에 가서 미제의 총알받이가 됐나, 노동자 착취, 무엇보다도 유신… 08번: 왜 선생님이 방금 말한 것들은 이 교과서에 안 나옵니까? (김종광, <<야살쟁이록>> 2권) 선생님이 설명해주는 말은 국사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은 것은 당연히 시험에도 안 나온다. 학교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역사를 알게 된 아이들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의 요약본을 미리 읽고 있는 셈이다.  
 
한순미, <지울 수 없는, 학교>,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84-87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84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