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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의 아들 학초(學樵)의 묘지명[兄子學樵墓誌銘]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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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樵字漁翁。小名封六。先仲氏巽菴先生之子也。先生屢擧男不育。晚而得此子。愛之甚篤。故樵也語小訥。然六七歲。已知讀書史。議其得失。嘗論孫武敎婦人兵法。疑右婦人左婦人。訓義難通。而自立其意見。果本義也。觀者莫不歎嗟。又妙解弈碁。七八歲已與長老對局。無不見以爲勍敵。十歲學業日就。名噪知舊間。顧性好經典。每讀詩書論孟。其所問疑義。多不可遽答。必聽其自解而後。乃當於理也。嘉慶辛酉春禍作。先生謫薪智島。余謫長鬐。及冬再逮再活。仲氏謫黑山島。余謫康津。兄弟一路作行。樵也以編髮送行于華城之南柳川之店。時年十一也。家有番國所產蛇眼珠一枚。乃巨蟒眼睛。凡此珠所在。蛇蝮不敢近。遇有衝撞。卽以珠照之。蛇皆立斃爲槁木。蓋異珍也。樵也泣而獻之曰黑山蓁蓁多蛇蝮。願以是自護。先生受而囊之。亦潸然出涕。遂與爲別。其後余見二兒書。每云樵也好學如舊。而相愛如同胞。尤嗜經傳義理。或條列問目以寄二謫。旣冠旣娶。擬携至茶山。乘海船以覲黑山。而凶聞遽至。樵已死矣。嗚呼惜哉。嫂與二兒。議取族人之子。爲樵也立後。余告仲氏曰雖大宗之子。未及承重而死則不爲之立後。而立其次子禮也。況先生本是支子乎。況我無所戴。而可取疎遠之子乎。先生有庶子學蘇。他日產子。立之爲樵也後。庶乎酌古今而得宜也。先生曰然。遂遣之。余自流落以來。所著六經四書之說二百四十卷。待樵也以傳。今已矣。 
학초(學樵)의 자는 어옹(漁翁), 소명(小名)은 봉륙(封六)이니 선중씨(先仲氏) 손암 선생(巽庵先生, 이름은 약전(若銓))의 아들이다. 손암 선생은 여러 번 아들을 낳았으나 키우지 못하고 만년에 이 아들을 얻어 지극히 사랑하였다.
학초는 말이 조금 서툴렀다. 그러나 6~7세 때에 이미 서사(書史)를 읽고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았다. 일찍이 손무(孫武)가 부인(婦人)에게 병법을 가르치는 것을 논할 적에 우부인(右婦人)ㆍ좌부인(左婦人)의 훈의(訓義)가 통하지 않음을 의심하여 스스로 의견을 내세웠는데, 과연 본뜻이었다. 보는 이는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또 바둑을 신묘하게 알아 7~8세에 이미 어른들과 대국(對局)하였는데 모두 강적으로 여겼다.
10세에 학업이 날로 진취여 지구(知舊)들 사이에 이름이 드날렸다. 다만 천성이 경전(經典)을 좋아하였다.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를 읽을 적마다 그가 질문한 의의(擬議)는 갑자기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많았고, 반드시 그가 스스로 해석하는 것을 들은 뒤에야 사리에 합당하였다.
가경(嘉慶)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가 일어나서 손암 선생은 신지도(薪知島)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갔다. 겨울에 다시 잡혀왔다가 다시 살아나 중씨(仲氏)는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되고 나는 강진(康津)으로 정배되어 형제가 같은 길로 길을 뜨게 되었다.
학초는 땋은 머리로 화성(華城)의 남쪽 유천(柳川)의 점사(店舍)에서 전송하였는데 그때 나이 11세였다.
.... 내가 유락(流落)한 이래로 저술한 육경(六經) ㆍ 사서(四書)에 관한 학설 2백 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형 정약전(丁若銓)의 아들이자 조카인 망자가 17세의 나이에 죽자 애통해 하면서 슬픔을 묘지명으로 표현하였다. 불우한 세파에 속에서 총명했던 조카를 영결해야 하는 참담한 심정이 엿보인다. 
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시문집9茶山詩文集)1}권16, [형자학초묘지명(兄子學樵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