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초(學樵)의 자는 어옹(漁翁), 소명(小名)은 봉륙(封六)이니 선중씨(先仲氏) 손암 선생(巽庵先生, 이름은 약전(若銓))의 아들이다. 손암 선생은 여러 번 아들을 낳았으나 키우지 못하고 만년에 이 아들을 얻어 지극히 사랑하였다.
학초는 말이 조금 서툴렀다. 그러나 6~7세 때에 이미 서사(書史)를 읽고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았다. 일찍이 손무(孫武)가 부인(婦人)에게 병법을 가르치는 것을 논할 적에 우부인(右婦人)ㆍ좌부인(左婦人)의 훈의(訓義)가 통하지 않음을 의심하여 스스로 의견을 내세웠는데, 과연 본뜻이었다. 보는 이는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또 바둑을 신묘하게 알아 7~8세에 이미 어른들과 대국(對局)하였는데 모두 강적으로 여겼다.
10세에 학업이 날로 진취여 지구(知舊)들 사이에 이름이 드날렸다. 다만 천성이 경전(經典)을 좋아하였다.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를 읽을 적마다 그가 질문한 의의(擬議)는 갑자기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많았고, 반드시 그가 스스로 해석하는 것을 들은 뒤에야 사리에 합당하였다.
가경(嘉慶)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가 일어나서 손암 선생은 신지도(薪知島)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갔다. 겨울에 다시 잡혀왔다가 다시 살아나 중씨(仲氏)는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되고 나는 강진(康津)으로 정배되어 형제가 같은 길로 길을 뜨게 되었다.
학초는 땋은 머리로 화성(華城)의 남쪽 유천(柳川)의 점사(店舍)에서 전송하였는데 그때 나이 11세였다.
.... 내가 유락(流落)한 이래로 저술한 육경(六經) ㆍ 사서(四書)에 관한 학설 2백 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형 정약전(丁若銓)의 아들이자 조카인 망자가 17세의 나이에 죽자 애통해 하면서 슬픔을 묘지명으로 표현하였다. 불우한 세파에 속에서 총명했던 조카를 영결해야 하는 참담한 심정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