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수(學樹)는 자는 예숙(藝叔), 소명은 칠복(七福)이니, 선백씨(先伯氏) 진사공(進士公 이름은 약현(若鉉))의 맏아들이다. 선백씨공(先伯氏公)이 종통(宗統)을 이은 집으로, 경주 이씨(慶州李氏)에게 장가들어 3녀를 두고, 뒤에 의성 김씨(義城金氏)에게 장가들어 3녀를 낳고 오래도록 자식이 없다가, 가경 정사년(1797, 정조 21) 3월 16일에 비로소 아들 하나를 낳으니 곧 학수이다. 그때 공의 나이 47세이니 종족이 다 경하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문자(文字)를 좋아하여 매질을 가히지 않았으나 사장(詞章)이 일찍 성취되었다. 자호를 종옥산방(種玉山房)이라 하였다. 남에게 준 시율(詩律)은 문장을 정성껏 다듬어 기록하였는데, 모두 소쇄(瀟洒)하여 탈속(脫俗)하였다. 그래서 이를 본 사람은 모두 ‘정씨(丁氏)의 집안이 쇠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관례(冠禮)를 한 뒤에는 또 성연(惺然 깨달은 모양)히 깨친 바가 있었다. 그 종형 학연(學淵)ㆍ학유(學游) 등과 뜻이 계합(契合)하고, 우애가 동복형제와도 같았으며, 무릇 싸워서 반목하고 불평하는 소리는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사람됨에 관후(寬厚)하고 평이(平易)하며 남을 포용하는 아량이 있었으며 마음가짐이 공평하여 편파적인 누(累)를 일체 씻어버렸다.
날마다 그 계부(季父 정약용 자신을 말함)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기도하여 장차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수학하려 하였다. 그런데 무인년(순조 18, 1818) 9월 15일에 내가 강진(康津)으로부터 은전을 입어 향리로 돌아오니, 학수가 죽어 연제(練祭)를 지낸 지 이미 3일이 지났다. 아, 애석하도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아들이자 조카인 정학수가 21세의 나이에 죽자 애통해 하면서 슬픔을 묘지명으로 표현하였다. 가문의 기대를 받고 저자인 정약용을 따르던 큰 조카의 죽음을 뒤늦게 접한 후에 느끼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