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부 심씨는 나의 벗 심욱(沈澳)의 딸이고 나의 작은 아들 학유(學游)의 아내이다. 조부는 용궁현감(龍宮縣監) 경석(景錫)이고 증조부는 예조 판서 곡(穀)이다. 그 선대는 청송 사람이다. 국초(國初)에 좌명공신(佐命功臣)인 할아버지는 덕부(德符)이니 좌의정을 지냈고, 그의 아들 온(溫), 손자 회(澮)는 모두 영의정이다.
그 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순문(順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달원(達源), 관찰사 전(銓), 관찰사 우승(友勝), 이조 판서 액(詻)이 또 5세(世)를 혁혁하였다. 전부(典簿) 광사(光泗), 정언 상(相), 진주 목사 득량(得良)이 또 가문을 면면히 이었다. 판서 곡은 진주 목사공의 아들이다.
건륭(乾隆) 정미년(1787, 정조 11) 11월 17일에 태어나서, 나이 14세에 우리집으로 시집왔으니 곧 가경(嘉慶) 경신년(1800, 정조 24) 봄이다. 이해 여름에 건릉(健陵 정조의 능으로 정조를 가리킴)이 승하하고, 그 이듬해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내가 영남 장기(長鬐)로 귀양갔다가 겨울에 다시 강진(康津)으로 귀양갔으며, 그 뒤 16년이 지난 병자년(1816, 순조 16) 8월 초10일에 효부가 죽었다.
효부가 죽고 3년이 지난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내가 향리로 돌아오니 그 무덤에는 이미 풀이 가득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아들 정학유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심씨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슬픔을 묘지명에 표현하였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함께한 시간이 겨우 1년이고, 18여년을 시어머니를 봉양한 며느리가 후사도 없이 죽음에 이른 것에 대한 참담한 심경이 절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