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녀(幼女)는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임자년(1792, 정조 16) 2월 27일에 태어났다. 그 애 어미가 순산한 것을 효(孝)라고 여겨 처음에는 ‘효순(孝順)′이라고 불렀는다. 이윽고 부모의 사랑이 깊어져서 그를 부를 때의 설권음(舌卷音) 때문에 음이 전하여 ‘호동(好童)’ 이 되었다.
조금 컸을 때는 감아빗는 머리가 이마를 덮어 늘어진 품이 게의 촉수와 같았다. 그러므로 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다시 한글로 ‘게압발(揭押勃)’이라 불렀다.
성품도 효순하여 부모가 화가 나서 다투면 문득 옆에서 웃음지으면서 양편의 화를 모두 풀어 주었으며, 부모가 간혹 때가 지나도록 밥을 먹지 않으면 애교스러운 말로 식사를 권했다.
태어난 지 24개월 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발진이 잘 안 되고 검은 점이 되더니 하루 만에 숨이 끊어졌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어려서 죽은 자신의 딸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광지(묘지문)의 형식으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