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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자(幼子) 삼동(三童)의 예명(瘞銘)[幼子三童瘞銘]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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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秋。余謫金井。歸而歲除。越明年卽嘉慶丙辰正月。日維奎開。夫人有身。以十一月五日擧一男。以新歸而娠。又鐘文明而將末出也。有是三喜。呼曰三童。生而有骨。自頂至額。凸起作廉稜。謂之伏犀。是蓋類余而益大者也。丁巳秋。挈至谷山。戊午八月。中痘而濃不灌。泄大作。牙疳起。以九月四日夭。悲夫。令奴石往埋于廣州草阜之鳥谷。越明年春。移瘞于斗尺之麓。是唯曾祖父之墓地也。 
을묘년(1795, 정조 19)가을 내가 금정(金井)으로 귀양갔는데, 돌아오니 해가 바뀌게 되었다. 다음해 즉 가경(嘉慶) 병진년이다. 정월 일에 규성(奎星) 운이 열려서 부인(夫人)이 아기를 가졌다가 11월 5일 사내아이 하나를 낳았다. 귀양에서 새로 돌아와 임신이 되었으며, 또 문명(文明)을 받았고 막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세 가지 기쁨이 있어 삼동(三童)이라고 불렀다.
나면서부터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뼈가 볼록 튀어나와 모가 져서 ‘복서(伏犀)’라고 불렀다. 이것은 나하고 비슷한 모양이나 나보다 더욱 크다. 정사년(1797, 정조 21) 가을에 가족을 이끌고 곡산(谷山)으로 나갔는데, 무오년 8월 중에 천연두가 돌아 발진이 되었으나, 배설을 하지 못하여 아감창(牙疳瘡)이 심해지더니, 9월 4일 어린 나이에 죽었다.
슬프다! 종 돌이를 시켜 광주(廣州) 초부(草阜)의 조곡(鳥谷)에 묻게 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두척(斗尺)의 기슭에 옮겨 묻었으니, 이곳은 증조부의 묘지 근처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어려서 죽은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예명(묘지문)로 표현하였다. 
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1}권17, [유자삼동예명(幼子三童瘞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