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년(1795, 정조 19)가을 내가 금정(金井)으로 귀양갔는데, 돌아오니 해가 바뀌게 되었다. 다음해 즉 가경(嘉慶) 병진년이다. 정월 일에 규성(奎星) 운이 열려서 부인(夫人)이 아기를 가졌다가 11월 5일 사내아이 하나를 낳았다. 귀양에서 새로 돌아와 임신이 되었으며, 또 문명(文明)을 받았고 막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세 가지 기쁨이 있어 삼동(三童)이라고 불렀다.
나면서부터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뼈가 볼록 튀어나와 모가 져서 ‘복서(伏犀)’라고 불렀다. 이것은 나하고 비슷한 모양이나 나보다 더욱 크다. 정사년(1797, 정조 21) 가을에 가족을 이끌고 곡산(谷山)으로 나갔는데, 무오년 8월 중에 천연두가 돌아 발진이 되었으나, 배설을 하지 못하여 아감창(牙疳瘡)이 심해지더니, 9월 4일 어린 나이에 죽었다.
슬프다! 종 돌이를 시켜 광주(廣州) 초부(草阜)의 조곡(鳥谷)에 묻게 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두척(斗尺)의 기슭에 옮겨 묻었으니, 이곳은 증조부의 묘지 근처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어려서 죽은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예명(묘지문)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