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집의 휘는 성환(成煥)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외모가 훤출하고 건장하며 성품은 순하고 언행은 겸손하며, 기억력이 아주 뛰어났고 문학에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 스물둘에 병에 걸려 죽었다.
아아, 나는 경집의 아버지의 친구로서, 경집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버지를 잘 알았다. 경집의 조부모는 경집의 아버지만을 일찍 기르고서, 뚝 끊기듯이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경집이 태어나자 손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작은 아들로 여겼으며, 경집의 부모 역시 감히 스스로 그 아들을 제 아들이라 하지 못하였는바, 경집도 어렸을 적부터 조부모를 제 부모로 여겼다.
급기야 경집이 죽자 그 부모는 감히 그 아들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늙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조부모는 차마 그 손자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아들의 슬픔을 더 크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두 살배기 아들은 그 아비에 대해 곡하는 슬픔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어미가 슬퍼하는 것 때문에 울어대니, 그 아내 이씨(李氏)는 감히 죽지도 못하고 또한 감히 곡도 못하고 속으로 울었다. 친척과 친구들은 유생(兪生)이 재주와 덕행을 지니고도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 아버지에게까지 조문하고 곡할 겨를이 없었으니, 그 조부모가 다 늙어서 작은 아들과 다름 없는 손자를 잃은 때문이다. 이것이 경집의 죽음을 대단히 슬퍼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애사를 지어 애도하는 바이다.
죽은 사람이 죽음의 슬픔을 모르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과, 산 사람이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함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슬플까?
어떤 이는 “죽은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산 사람이 그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일임을 슬퍼한 줄을 모르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산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이미 아무것도 몰라 슬퍼할 만한 것을 슬퍼함도 없으나, 산 사람은 날마다 그를 생각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하면 슬퍼서, 빨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기를 바라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효자는 더러 부모 여읜 슬픔으로 생명이 위급하기도 하고, 자부(慈父)는 더러 자식 잃은 슬픔으로 실명하기도 하고, 열부(烈婦)는 더러 자결하기도 한다. 이는 다 죽은 자에 대한 슬픔으로 말미암아 혹은 따라 죽고 혹은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슬픔은 함께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유경집의 죽음에 대해서 “산 사람이 슬프다.”고 단언한다.
무릇 사람의 감정으로 볼 때 가장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기로는, 나는 믿었는데 상대방이 속이는 것만 한 것이 없으며, 속임을 당한 고통은 가장 친하고 다정한 이가 문득 나를 등지고 떠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친하고 다정하기로 손자와 할아버지, 아들과 아버지, 남편과 아내 같은 사이보다 더한 경우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기를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또 믿어 의심함이 없기로는, 어느 것이 경집의 재주와 외모로 보아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경우와 같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상식과 이치에 어긋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니 어찌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아, 비록 그렇지만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슬퍼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슬퍼하는지 슬퍼하지 않는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평일에 나처럼 그를 아끼던 자가 어찌 애사를 지어, 한편으로는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이 제 슬픔에 슬퍼하지 못하는 것을 애도하지 않겠는가.
-벗의 아들이 죽자 그로 인한 상심과 고통, 비탄 감정상태를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한편 애도를 통하여 아픔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