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진년 11월 기축삭(己丑朔) 24일 임자에 죽은 아들 숭겸(崇謙)의 널이 양주(楊州)의 새로 잡은 언덕을 향해 발인할 예정이기에, 그보다 이틀 앞선 경술일에 늙은 아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영결하는 바이다.
아, 숭겸아, 너는 지금 어디로 가려느냐? 도성문을 나가 동으로 30리를 가면 있는 중령포(中泠浦), 망우령(忘憂嶺), 왕숙탄(王宿灘), 북두천(北斗川)은 모두 네가 일찍이 나귀를 타고 오가던 곳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널에 누워 그 길을 가게 되었단 말이냐. 삼주(三洲) 집 주위의 3, 4리 거리에 있는 서골암(棲鶻巖), 난가대(爛柯臺), 금대산(金臺山), 판사정(判事亭)은 모두 네가 일찍이 시를 읊으며 경치를 조망하던 곳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널에 누워 그곳에 머물게 되었단 말이냐.
6월 말에 네 어미가 서울에 들어갈 적에 너는 누이들과 함께 어미를 따라 갔는데, 20일이 채 못 되어 오 서방(吳書房)의 처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나는 너와 함께 가서 광주(廣州)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지금 또 100일이 채 못 되어 네가 죽어서 늙은 아비 혼자 널을 붙들고 장사를 치르게 하다니, 아, 화변(禍變)의 혹독함과 인사(人事)의 일정치 않음이 어쩌면 이리도 심하단 말이냐. 네가 이미 자식이 없이 죽었으니, 내가 죽은 뒤의 일을 알 만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창협이 죽은 아들 숭겸의 발인에 즈음하여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함을 제문으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