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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재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祭靜觀先生文]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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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歲次辛巳八月丙辰朔二十四日己卯。靜觀齋李先生之柩。出自加平朝宗之舊墓。靷而至楊州靈芝洞新卜之原。將以其九月初五日己丑葬。前三日丙戌。外甥安東金昌協。始克扶病來哭。設祭爲文而告曰。嗚呼。先生之墓于嘉陵。今卅有三。其木幾已刺天矣。雖金聲玉色。永閟於土中。而遺風餘韻之肅然在人間者。猶足以起偸而廉頑。況余之早親門墻。固已悅服乎當年。及其旣壯而老。備人事之推遷。益知其見幾之明哲。衛道之誠切。志節之卓邁。心事之灑落。世無復有此賢矣。每念今日儒林磔裂。風俗崩壞。而吾道日益迍邅。使先生而在。則尙可以救得一半。而顧何由復起於九原也。觀世之矞宇嵬瑣。奊詬頑頓。無益於時而有害於名敎者。類多黃馘而華顚。何壽考之偏畀於彼。而獨先生不能以久延也。此誠可爲太息流涕而深有憾於秉壽夭之權者也。若小子之禍故自廢。雖不敢妄擬於先生之高蹈。而棲遲丘壑。跡則相隣。卽平昔一二所聞。因復得以追理於簡編。其或有疑而有得。頗亦知當日忘食忘憂之所以然。惟性命之微妙。與象數之繁賾。實先生所嘗硏究而貰穿。此其說固具於周翁之圖。邵子之書。以下逮於二鮑之所論鐫。顧淺陋無從講質。只有撫卷而興歎。蓋自窮居而學道。所以慕先生者。愈切於前矣。乃今棺柩再出。英爽如還。而新兆之卜。又正食於太極靜觀之間。凡其俯仰左右。林巒澗谷。臺池泉石。皆昔杖屨之所相羊。而冠童之所蹁躚。豈故壟之灤嚙。固先生所以睠懷此幽棲。而亦欲一見我門人耶。然而儀形莫覩。謦咳無聞。而復永歸于重泉。惟後死之深慟。若新頺於泰山。陳一觴而告訣。聲淚出於肺肝。嗚呼哀哉尙饗。 
신사년 8월 병진삭(丙辰朔) 24일 기묘에 정관재 이 선생의 널이 가평(加平)의 조종현(朝宗縣)에 있는 옛 묘소에서 나와서 발인하여 양주(楊州) 영지동(靈芝洞)의 새로 잡은 언덕에 도착하였다. 9월 5일 기축에 장사를 지낼 예정인데 그보다 3일 앞선 병술일에 사위 안동(安東) 김창협은 비로소 병을 무릅쓰고 와서 곡한 뒤에 제물을 진설하고 다음과 같이 제문을 지어 고합니다.
아, 선생이 가평에 묻힌 지 이제 33년이 흘러 무덤의 나무가 하늘 높이 자랐습니다. 해맑은 목소리와 고운 안색은 비록 땅속에 길이 묻혔으나 사람들 사이에 엄연하게 남아 있는 유풍과 여운은 나약한 사람을 분발시키고 미련한 사람에게 사리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더구나 일찌감치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직접 받아 당시에 이미 진심으로 감복했던 저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장성하고 늙어 가며 인사(人事)의 변화를 두루 겪고 나서는 선생이 명철하게 기미를 보고 지성으로 간절히 도(道)를 보호하였으며 지조와 절개가 탁월하고 심사(心事)가 해맑았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세상에 더 이상은 그처럼 어진 분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유림이 분열되고 풍속이 붕괴되어 오도(吾道)가 나날이 더욱 어려움에 처하는 것을 생각할 때면 늘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다소나마 구제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하나 무슨 수로 황천에서 다시 살려낼 수가 있겠습니까. 거짓되고 옹졸하며 지조가 없고 미련하여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명교(名敎)에 해만 끼치는 자들을 보면 대체로 얼굴이 누렇게 마르고 머리가 허옇게 셀 때까지 사는 자가 많은데, 어찌하여 그런 자들에게만 장수를 누리게 하고 유독 선생에게는 수명을 연장시켜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야말로 참으로 장탄식하고 눈물을 흘릴 일로서, 인간의 수명을 결정하는 조물주에게 깊이 유감스러운 점입니다.
소자가 화를 당해 버려진 사람으로 자처한 것으로 말하면 비록 감히 선생이 세속을 멀리한 것에 함부로 비길 수가 없지만 자연 속에서 지낸 그 행적은 비슷하다 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소자는 평소에 선생에게 들은 한두 가지에 대해 다시 책을 보며 연구할 수가 있었는데, 간혹 의심이 드는 것이 있거나 터득되는 것이 있을 적이면, 그 당시에 선생께서 먹는 것도 잊고 근심도 잊어버린 채 학문에 매진하셨던 까닭을 자못 알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미묘한 성명(性命)과 복잡한 상수(象數)야말로 선생이 일찍이 연구하여 꿰뚫으신 것인데, 이에 관한 설은 실로 주옹(周翁)의 그림과 소자(邵子)의 글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로 두 포씨(鮑氏)가 논파(論罷)당한 일에 대해서는 학식이 얕은 제가 강론하고 질정할 곳이 없으니, 책을 어루만지며 탄식할 뿐입니다. 저는 곤궁하게 살며 도를 배우면서 전보다 선생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는데, 이제 관이 다시 땅속에서 나와 영명하신 모습이 돌아오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 잡은 묘소가 또 태극정(太極亭)과 정관재(靜觀齋) 사이에 위치하여, 좌우를 돌아보면 산과 골짜기, 누대와 못과 수석이 모두 지난날 선생이 한가로이 노닐던 곳이자 문생들이 놀던 곳이니, 이 어찌 옛 무덤이 수해를 당하자 선생이 호젓한 이곳을 그리워하고 또한 우리 문인을 한번 보고 싶어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선생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음성을 듣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이제 다시 영원히 황천으로 돌아가시게 되니, 남아 있는 저의 슬픔은 선생이 처음 돌아가셨을 때처럼 깊기만 합니다. 이에 술 한 잔을 올리며 영결을 고하노라니 통곡과 눈물이 간장에서 솟구쳐 나옵니다. 아, 슬픕니다. 부디 흠향하소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창협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묘를 이장하면서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함을 제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김창협(金昌協), {농암집(農巖集)}권30, [제정관선생문(祭靜觀先生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