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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제와 차별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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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잔인성 가운데 인간의 몸에 낙인을 찍는 것이 있다. 얼굴이나 몸에 먹물 등으로 글자를 새겨 평생 낙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팔목과 팔꿈치 사이나 얼굴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넣는 형벌이 있었는데 주로 도적이 그 대상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낙인을 찍는 형벌이 있었으나, 그 시행에 신중을 기하였고 이 또한 영조 16년(1740)에 사라졌다. 즉 얼굴에 낙인을 찍는 도구를 소각하고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전국에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인간을 괴롭히는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행해졌고 또 행해지고 있다. 빨갱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일에는 군대 경찰 같은 국가 기구뿐만 아니라 언론인 문인 종교인들도 가세했다. 빨갱이는 아예 없애야 하는 타자로서 위치 지워졌다. 빨갱이는 ‘우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점이 강조되었고, 이는 적대의식을 키워 갔다. 남한에서 빨갱이는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공동체의 외부 집단에 위치 지워졌으며, 위협과 적의를 제공하는 주체로 부각되었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따라서 사람들은 그 중 한 쪽에 서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차별 혹은 배제되었다. 반면에 경계인은 허락되지 않았다. 경계인은 남과 북의 이념적ㆍ국가적 경계 위에 아무 쪽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남과 양쪽이 서로 품고 있는 지점에 속한 존재에 가깝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경계인이 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무자비한 폭력의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남다은, 「전쟁기억의 표상들」, <<황해문화>>, 2010 여름) 통일운동에 종사했던 많은 이들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송두율 교수 사건은 그 증좌이다. 슬픈 일은 빨갱이는 그만이 아닌 가족에게도 확장된다는 점이다. 빨갱이로 한번 몰리기만 하면 본인은 사회에서 배제 격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연좌되어 가족과 친족 또한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어린아이라도 “빨갱이가 싫다.”고 외치면 영웅이 되고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9살의 소년 이승복은 사실여부가 논란거리이지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공산당에게 무참히 살해를 당했다고 한다. 이승복은 반공이라는 성전에서 빨갱이에 희생된 순교자로 언론과 교육현장에 오르내렸다. 그 후 기념관이 지어졌고 성지 순례와 같은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다. 1982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훈장동백장을 수여했다. 이승복과 다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백발의 ‘소년 빨치산’ 김영승>>에 따르면, 소년 빨치산 김영승은 1935년 태어나 15살의 나이로 1950년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4년 체포되었다. 1974년 형 만기와 동시에 반공법으로 기소되었고, 1976년에는 2차 만기 출소하였으나 사회안전법으로 보호감호 처분을 받아 복역하다가 사회안전법이 폐지된 1989년 9월 5일 출소하였다. 김영승에게 35년이란 세월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마저 빼앗아간 시간이었으며, 그가 보냈던 교도소는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된 배제의 공간이었다. 고문과 구타 그리고 경멸의 시간이었으며, 몸서리치는 비명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출소하였다 하여 그가 진정으로 자유를 얻었을까? 아니다. 그에게 보호관찰자란 낙인이 찍혔다. 그의 표현대로 “출옥한 것은 작은 감옥을 나온 것일 뿐 감옥 생활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직장마저도 포기한 채 민족의 통일운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이 없도록 하자고 말이다. 
 
김창규, <분단과 전쟁의 상흔>,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66-68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6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