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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의 슬픔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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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남긴 상흔과 그 슬픔이 전쟁의 종결과 함께 정지되거나 혹은 고착된 것이 아니었다. 주체들의 입장에 따라 어떤 것은 용인되고 어떤 것은 가공 변형되었다. 때로는 공식 기억에 편입되거나 다른 것은 망각되거나 소멸되기도 했다. 흔히들 슬픔은 상실에서 온다고들 한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실의 흔적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수많은 인명과 천문학적인 재산의 상실은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전쟁에 참여한 인명피해는 군대 240만 명에 달하였으며, 일반 국민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는 집중적인 포격을 받아 거의 폐허로 변해버렸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부부, 부자, 형제, 이웃 간의 영원한 이별이었고, ‘이산’은 이들 사이의 생이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처는 오랫동안 아물지 않고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슬픔은 더 깊고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83년 7월 5일 [경향신문] ▶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향수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민족의 명절이나 조상의 제삿날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에게 이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망향’의 동산이나 북녘 땅 가까운 곳에서 고향을 바라보면서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워할 수밖에. 이산의 슬픔은 실향민이나 이산가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민의 슬픔이었다. 1983년 모 방송사는 <이산가족 찾기>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분단과 전쟁에 의해 헤어져야 했던 이들의 부모와 형제 찾기는 온 국민을 울렸다. 당사자이건 아니건 온 국민은 그 슬픔에 동참하여 눈물을 흘렸고, 세계인도 여기에 동참했다. 허나 슬프게도 이 또한 대한민국에 한해서 국한된 일이었다. 잠시 희망의 빛도 보였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남북 이산가족들은 고향에 계신 그리고 고향을 떠난 부모 형제를 상봉할 수 있게 된다. 몇 차례의 상봉을 통해 이산가족들은 헤어진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50여 년의 세월은 너무나 잔혹하기만 했다. 이미 고인이 되거나 고령으로 만날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 슬픔은 더 했을 것이리라. 이나마도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다 알다시피 이산가족 상봉은 회수나 시기가 제한적이었다. 수많은 이산가족이나 실향민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북녘에 남겨두었거나 혹은 북으로 간 부모 형제들의 생사마저 확인할 수 없다. 63년이 지난 오늘 남과 북에 남겨진 부보 형제들 대부분은 고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곧 생을 마감하는 문턱에 도달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늘도 사랑하는 남편, 부인, 자식, 형, 동생 그리고 친지나 이웃과의 만남을 간절히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가야 한다. 전라북도 전주시 풍남동 이석례 할머니는 63년 동안 6ㆍ25 때 납북된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살고 계신다 한다. 할머니께서는 남편이 언제 오실지 몰라 남편과 살던 그 집에서 살고 계신다. 심지어 노구의 몸인 할머니를 자식들이 모신다고 해도 혹여 할아버지께서 언제 찾아오실지 몰라 기다림 속에서 살고 계신다. 분단과 전쟁이 남긴 슬픔의 편린이다. 이석례 할머니만의 특수한 사정일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부, 부자, 형제가 헤어져야 했던 모든 이들의 슬픔은 극복되거나 치유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픔을 알아야 하며, 어떻게 위로해 주실 수 있을 것인지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김창규, <분단과 전쟁의 상흔>,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61-64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6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