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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체험과 슬픔의 기억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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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1932년 상해의 해군위안소가 최초라고 한다. 하지만 이 숫자는 이미 위안소의 개업과 폐업을 수차례 거친 뒤이기 때문에 설치시기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어쨌든 1937년 12월 중국 남경을 점령한 이후 일본군위안소가 본격적이고 대대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위안소는 일본 육군성의 주도 아래 본격적으로 일본군 전체를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시행되었다. 군위안소의 조직은 다양했다. 현지의 병참사령부가 직영하는 위안소와 민간인 업주나 유곽주인이 경영 관리하는 군전용위안소가 있었다. 민간업자는 “매춘업자, 대륙낭인, 군소 용달업자, 일본인 업자에게 배운 한국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일본군의 전반적인 감독과 규제를 받았다. 군위안소는 지역에 따라 육군용과 해군용으로, 또는 사병용과 장교용, 군속용으로 구분되었다. 경우에 따라 부대 주변의 유곽을 점거하여 군 위안소로 만들거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점령지에서는 호텔이나 사원 등을 빼앗아 쓰기도 했다. 1938년 10월 경 중국에만 3만에서 4만의 군위안부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군위안소의 구조는 대부분 동일했다. 입구에서 표나 돈을 받고 군인의 출입을 확인하는 관리인이 존재했다. 그리고 기다란 복도에 따라 작은 성냥갑 같은 방이 죽 늘어서 있었다. 방은 한 사람 누울 정도의 규모이며, 담요 한 장이 주어졌을 뿐이다. 공점엽은 “아이고 참말로. 나 원 없이 고생했어. 살아났으니까 이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어. 어휴. 살아난 거 생각하면 아주 꿈도 같고, 하루에 열 일곱 명을 받고 나니 막 그냥 어지럽고 막 뱅뱅뱅 돌아 갖고는 정신없이 나다니면 술 먹었냐고 그래. 손님이 와서. 술은 나 못 먹는다고. 그때만 해도 술은 한 모금도 안 했지. 술 안 먹어도 그렇게 머리가 아프다고 그랬어.”(증언자료집,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일상생활은 철저하게 억압, 통제되었다. 조선인 피해 여성들은 우리말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름도 ‘하나코’, ‘기미코’ 등 일본식 이름이나 방 번호로 불렸다. 그리고 서로 친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감시당했다. 「중국에서」 (배춘희 작) 군위안부는 어떤 경우든 주 1회 또는 월 2회 각 부대의 군의관에게 성병 검진을 받았다. 이러한 강요는 검진이란 명목으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의사 앞에 벌거벗은 채 서게 한 것이다. 검진은 피해 여성에게 심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주었다. 일본 군대 사회에서 군위안부 특히 조선인은 가장 낮고 비참한 존재였다. 병사들 대부분은 이들을 멸시했다. 심지어 상급자로부터 받은 모욕과 폭력, 전투로 인한 광기와 공포를 고스란히 그녀들에게 전가했다. 강순자(가명)는 “부모가 보고 싶어 걱정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고, 못 먹는 술로 빼갈도 다 먹어보고. 빼갈 얼마나 독하노, 빼갈 그 한잔을 먹으면 어찌 그리 눈물이 많이 날꼬. 고향 생각도 많이 나고. 남 몰래 화장실에 가서 다 울어보고 뒷 모퉁이 가 다 울어보고. 참 내가 어쩌다가 그리 걸려가 고생하는가 싶고. 나만치 고생한 사람을 없을끼다.”(증언자료집,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군 위안소는 일본, 조선,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등 일본군이 전쟁을 하거나 주둔하는 곳마다 설치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대가 이동할 때는 피해자 여성들을 끌고 다녔다. 그래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걸쳐 여러 나라에 피해 여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피해 여성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본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하나의 국가 단위를 넘어서 국제적 연대가 요구되었다.  
 
류시현, <망각을 일깨우는 낮은 목소리>,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46-49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4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