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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업사기와 폭력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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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발 빠른 서구화를 통해 근대 국민국가를 이뤘고, 주위 국가를 침략해서 비유럽사회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대만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다음 1931년 만주 침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을 차례로 일으켰다. 이러한 전쟁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발생시켰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도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주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중국은 물론 필리핀·만주·인도네시아 등 일본군 점령지마다 군위안소를 설치하고 군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군위안부’로 끌려 간 각국 여성의 수는 최소 8만에서 최대 15~20만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80%가 식민지 조선인 여성이었다. 「끌려가는 날」 (김순덕 작) 피해 여성 동원의 일반적 방법은 취업사기였다. 조선인 여성들에게 일본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 가서 “빨래하고 밥 짓는 정도의 일”을 하면 된다고 속였다. 몇 달치 월급을 선불로 주기도 했다. 공장 외에도 간호부, 위문단, 가극단 등에 보내준다고 했다. 함남 흥남 출신인 배봉기는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말에 어떤 여자 소개인을 따라나섰다. 경남 의령 출신인 17세의 김순덕은 “일본 공장에 취직할 여성을 모집한다.”며 마을에 나타난 어떤 조선 남자에게 속았다. 김화자(가명)는 “일본 순사가 ‘일본군인 옷 하는데 미싱도 배우고 하면 돈 벌이도 좋고 가마니 짜는 것보다 낫지’ 그러대. 그러면 돈을 집으로 부쳐 주느냐고 물었지 내가. 그러니까 일본 순사가 … 다달이 월급 받으면 집으로 부쳐준다고 그러대. 그래 나도 ‘아이구 그러면 쫌 사는 게 안 낫겠나?’ 내 속으로 그렇더라. 그래서 일본순사가 ‘집에 가서 있으면 연락할게’ 그러더라.”(증언자료집,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폭력도 여성 동원의 한 방법이었다. 경남 하동 출생인 17세 손판임의 아버지는, 이미 ‘처녀공출’의 소문을 들었기에, 딸에 대한 취업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를 권유했던 일본여성은 일본남자와 함께 와서 아버지를 완력으로 쓰러뜨리고,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 1940년 끌려간 노현화도 마을의 한국인 지주와 일본인에 의해 완력으로 화물차에 태워졌다. 협박도 존재했다. 경남 하동 출생인 정서운은 집안이 가난하지 않아 취업이 절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공출을 피했다는 죄목으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마을 면장이 그녀에게 아버지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일본의 방직공장을 가라고 협박했다. 해방 후 그녀가 귀국했을 때, 아버지는 감옥에서 숨을 거뒀고, 어머니는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류시현, <망각을 일깨우는 낮은 목소리>,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42-43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42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