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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의 상복(喪服)마련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신들의 이견(異見)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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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원문]5월. 임금이 하교하기를, “인순황후(仁順王后)께서 전일 조정에 임하여 청정(聽政)하였으니 군신이 3년상을 행하는 것이 가할 듯하다. 대신과 예관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대사간 김계휘(金繼煇)가 대사헌 유희춘(柳希春)에게 말하기를, “이 일이 잘못 정해지면 분별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처음부터 확실하게 분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양사 전원을 거느리고 합문에 엎드려 아뢰기를, “대왕과 왕후의 상(喪)은 각각 정례(定禮)가 있는 것이니, 지금 다시 의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는, 정원(政院)이 임금의 교시가 잘못된 것을 도로 올리지 않은 것[逆啓]은 잘못이라고 하여 추문(推問)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다시 의론하지 말라. 다만 자공(子貢)은 3년상이 정제(定制)인 줄 알면서도 공자에 대해 6년상을 홀로 행하였으니, 사람의 소견이란 혹 같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양사(兩司)가 합동하여 합문에 엎드려 간언할 것이 뭐 있으며, 또 무엇 때문에 꼭 정원을 추문하라고 까지 하느냐?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양사가 이에 물러나왔다. 이이가 양사가 합계하였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양사가 합동하여 합문에 엎드려 간언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할 때 하는 것인데, 이런 일로 양사가 합동으로 다룰 필요가 있는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상사에도 이런 의론이 있었다. 그때는 윤원형(尹元衡)이 당국(當國)하였으나 오히려 3년상을 행하자는 건의가 없었거늘, 더구나 지금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대신이 현명하면 반드시 예를 삼가서 할 것이요, 대신이 현명하지 못하면, 자신부터 3년상을 꺼릴 것이다. 이런 의론은 전혀 염려할 것 없는 것인데 중회(重晦 김계휘의 자)가 경솔하여 경황히 양사를 합하였으니, 임금의 교시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였다.
○ 사헌부 지평 민순(閔純)이 상소하여, 졸곡(卒哭) 뒤에 송 나라 효종(孝宗)의 예(例)를 따라 흰 의관으로 일을 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과 예관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영의정 권철(權轍)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섬(洪暹)은 말하기를, “졸곡 뒤 사무를 보는 데 검은 관[玄冠]ㆍ흰옷[素衣]ㆍ검은 띠[烏帶]를 쓰도록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으니 경솔히 변경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좌의정 박순과 우의정 노수신은 말하기를, “흰 의관으로 일을 보는 것이 바로 예의 뜻에는 합당한 것이나, 이를 변경하려는 것이라면 아랫사람들이 천단(擅斷)할 것이 아니라 주상의 생각으로 단정하십시오.” 하니, 전교하기를, “좌ㆍ우의정의 의논을 좇으려 하노니 예관은 이공(二公)과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에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흰 의관의 설을 따르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고례(古禮)를 널리 상고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임금이 상사에 예를 다하려 한 때문에 민순의 상소를 썩 좋다고 받아들이니, 유속(流俗) 대신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많았다. 박순과 노수신이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 장관을 회합하여 어전 회의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홍문관에서 고례를 참고 인용하여 아뢰니 그 대략 이르기를, “꼭 선왕(先王)의 예법에 하나 없이 다 맞게 하려면 당초 상하가 모두 최질(衰絰)의 상복을 갖추어 《의례(儀禮)》에 있는 제도대로 하고, 별도로 포모(布帽)ㆍ포단령(布團領)ㆍ포대(布帶)를 만들어 사무를 볼 때의 복색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시기를 놓쳐 다시 《의례》대로 회복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송 나라 효종 때의 제도에 의하여 흰색의 의(衣)ㆍ관(冠)ㆍ대(帶)로 사무를 보는 것이 고례에 가까울 것입니다. 현관(玄冠)ㆍ오대(烏帶)의 제도는 정리와 예의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송 나라 고종(高宗) 때 나점(羅點)이 이 제도를 건의한 것이니, 그때는 상례의 기강이 퇴폐하여 달이 바뀐 뒤에는 순전히 길복(吉服)을 썼기 때문에, 나점의 이 의론이 오히려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변론(辯論)이 상세하오니. 어찌 주자의 의론을 따르지 않고, 나점의 의론에 구애되겠습니까. 《오례의》를 찬정할 때에 참찬(參賛) 허주(許稠)가 나점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마침내 정론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예를 아는 유신이 없어서 선왕을 정례(正禮)로 인도하지 못한 것을 지금까지 지사(志士)들이 개탄하여 마지않는 것이오니, 어찌 오늘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어전 회의에서 이품 이상은 모두, 《오례의》는 조종(祖宗) 때에 찬정하여 행한 지 이미 오래된 것이니, 뒤를 잇는 왕이 경솔히 변경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삼사 장관 가운데선 대사간 김계휘(金繼煇)와 부제학 이이는, “상례를 고도(古道)로 못한 지가 오래니 이 기회에 응당 변통하여 근고(近古)의 예를 좇아야 할 것이라.” 역설하였으나, 대사헌 유희춘(柳希春)은, “조종의 전례(典禮)를 준수하여야 한다.” 하고, 또, “임금이 상을 입는 것은 사대부와 다른 것이다.”고 했다.
김계휘가 유희춘에게 이르기를, “부모의 상은 귀천 없이 한 가지인데 임금의 거상이라고 해서 어찌 사대부와 다르겠으며, 또 같지 않다는 것은 어떤 전적에서 나왔소?” 하니, 유희춘이 말하기를, “권덕여(權德輿 당 나라 중기의 재상)의 말에 그러합디다.” 하였다. 김계휘가 말하기를, “공이 만 권의 책을 일고도 소견 없이 권덕여의 말을 좇으려 하오.” 하니, 유희춘이 말이 없었다.
임금이 뭇 신하들의 의론이 마음에 쾌하지 않아 좌ㆍ우의정에게 전교하기를, “뭇 의론이 모두 조종이 행하던 예를 변경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니, 내가 독단하기 곤란하다. 경들이 잘 알아서 처리하오.” 하니, 박순(朴淳)과 노수신(盧守愼)이 아뢰기를, “《오례의》에선 대개 소색(素色)을 따랐고, 다만 현관(玄冠)ㆍ오대(烏帶)만 색이 다를 뿐입니다. 지금 크게 변경하는 것도 아니요, 다만 관대만이 검은 것을 흰 것으로 고칠 뿐이니, 신들 뜻으로는 백색 관대를 좇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경들의 의논이 매우 내 마음에 맞으오.” 하고, 그 말을 좇았다.
이때 경대부(卿大夫)가 모두 속류(俗流)라, 정론(正論)이 매우 약했으나, 임금의 마음이 굳게 예를 좇으려 하고 좌우 정승이 그 뜻을 받든 때문에 속론(俗論)이 능히 성립되지 못하였다. 예조 판서 홍담(洪曇)이 《오례의》를 변경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강력히 말하였으나, 임금이 이미 흰 의관을 쓰는 의논을 좇으니, 홍담이 몹시 성난 빛을 하고는, “임금이 거상(居喪)은 결코 사대부와 같은 것이 아니다.” 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였다. 홍섬(洪暹)은 《오례의》가 변경된 것을 듣고 탄식하다가 울기까지 하며 말하기를, “오늘날 조종전례(祖宗典禮)가 변경되는 것을 볼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하였다. 이때 찬성이 결원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묻기를, “누가 찬성[二相]이 될 것인가?” 하니, 홍담이 말하기를, “이이(李珥)와 민순(閔純)이 반드시 이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민순이 상소하고 이이가 그것을 극력 주장하였기 때문에 홍담이 분해하고 질투가 나서 하는 말이었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오례의(五禮儀)》에 정해진 상례(喪禮)를 한(漢)ㆍ당(唐)에 비하여 보면 훨씬 잘되었다 할 것이니, 이것 역시 동방의 성전(盛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고례(古禮)로써 참작해 보면 어찌 미진한 것이 없으랴. 지금 이것을 변통하여 옛 도를 좇으려 하는데 조정 신하가 좇지 않으려 함이 마침내 이와 같았다. 유속(流俗)이 옛 도를 좋아하지 않음 은 이치와 형세가 그러하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다만, 지금의 상례에도《오례의》를 모두 준행하지는 않는다. 졸곡 뒤의 사무복색은 검은 관ㆍ검은 띠이나 통상복은 백립(白笠)에 백대(白帶)로 하는 것이 《오례의》에 기재되었건마는, 인종의 상사(喪事)에 이기(李芑) 무리가 백립을 흑립(黑笠)으로 변경할 당시에는 조종의 법을 변경시킨다 하여 탄식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때 홍섬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았다면 조종의 법을 변경하여 세속의 패례(悖禮)를 좇는 것은 해가 없다 하고, 조종의 법을 변경하여 고례(古禮)를 좇는 것만이, 해가 있다는 말인가. 속된 선비의 심리란 역시 이상한 것이다. 
졸곡 후 왕이 사무를 볼 때 의관을 조종전례(祖宗典禮)에 따라야 할지 사대부례에 따라야 할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양분 되었다.
선조가 대신과 예관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찬성이 결원이었다. 어떤 사람이 누가 찬성[二相]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묻자 예조 판서 홍담(洪曇)은 이이(李珥)와 민순(閔純)이 반드시 이상이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예조판서 홍담은 {오례의}를 변경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반면 민순은 {오례의}를 변경하자고 상소하고 이이는 이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순과 이이의 태도에 홍담은 분해하고 질투가 나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기 때문에 홍담이 분해하고 질투가 나서 하는 말이었다. 
{석담일기(石潭日記)}上, 만력(萬曆) 삼년(三年) 을해(乙亥) 오월(五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