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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의 노여움

노(怒)
부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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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원문]임금이 신도(新都)로 가다가 임진(臨津)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가다가 천수사(天水寺) 앞에 이르러 언덕과 들을 돌아다니며 매를 놓아 사냥하고 임진(臨津)에 머무르니, 집의(執義) 조휴(趙休)와 지사간(知司諫) 조서(趙敍) 등이 간하기를, “이번 거둥은 장차 고묘(告廟)하려고 함인데, 백관(百官)과 의장(儀仗)을 버리시고, 단기(單騎)로 사냥하며 행하시니, 재계(齋戒)하는 뜻에 어떠합니까? 또 언덕과 웅덩이가 어찌 두렵지 않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불씨(佛氏)의 도(道)에 의하여 살생(殺生)하지 말라는 말이냐?”하였다. 휴(休) 등이 말하기를,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라, 백관들이 모두 법가(法駕)가 향하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주상께서 단기(單騎)로 나가 노[出遊]시고 신 등의 간(諫)하는 말을 유윤(兪允)하시어 말하기를, ‘나도 또한 후회한다.’ 하시었는데, 수일(數日)이 못되어 또 단기(單騎)로 달리시니, 신 등은 불가(不可)하게 생각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인군(人君)은 사냥하는 법이 없느냐?” 하니, 휴(休) 등이 말하기를,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거둥은 고묘(告廟)하기 위한 것이요, 사냥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냥을 하시려거든 곧 명하기를, ‘아무 날 아무 곳에서 사냥한다’ 하는 것이 가합니다. 어찌 고묘하면서 사냥을 겸행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너희들이 이미 치재(致齋)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인민(人民)들이 이번의 행차를 사냥을 위한 것이고, 고묘(古廟)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내가 도로 돌아가겠다.” 하니, 휴(休) 등이 말하기를, “이제 이미 명령을 내리시고 가지 않는 것도 또한 불가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휴(休) 등이 다시 상소하여 말하기를, “근일에 전하께서 단기(單騎)로 호관(壺串)에 나가시어 사냥하였으므로, 대간(臺諫)이 상소하였는데, 모두 유윤(兪允)하시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고명(誥命)을 받은 것을 고하시고 친히 종묘(宗廟)에 제사하려고 하여, 승여(乘輿)를 움직여 겨우 도성문(都城門)을 나오시매, 평탄한 길로 행하시지 않고, 또 경기(輕騎)로서 들[郊野]에서 사냥하시어, 시종(侍從)하는 신료(臣僚)들이 전하의 가신 곳을 알지 못하므로, 신 등이 대궐에 나와 계문(啓聞)하여 신총(宸聰)을 깨우치려고 하였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환가(還駕)를 명하시니, 전하께서 선조(先祖)를 받들어 효도하기를 생각하고, 간(諫)함을 좇기를 물 흐르듯 하는 뜻에 실로 부족함이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거가(車駕)를 돌리시지 마시고 친히 종묘에 제사하여, 정성과 공경으로 선조를 받들고, 위엄과 신의로서 아랫사람을 어거하면,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이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하였다.
대언(代言)들이 임금의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았으므로 계문(啓聞)하지 못하였다. 우정승 성석린(成石璘)·영승추(領承樞) 이무(李茂)·판승추(判承樞) 조영무(趙英茂)가 장전(帳殿)에 나아가서 돌아가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듣지 않고 사인(舍人) 이회(李薈)를 불러 앞에 나오게 하여 명령하기를, “일진(日辰)의 길흉이 비록 믿을 것은 못되나, 동가(動駕)한 날이 바로 나의 유혼일(遊魂日)이니, 예전 사람이 꺼리는 바이고, 또 태상왕(太上王)이 편치 못하신데 종묘에 일이 있으니, 마음이 불안하고, 대간(臺諫)이 말을 달려 사냥하는 잘못을 극진히 말하니, 치재(致齋)의 도(道)에 있어 더욱 혐의스럽다. 또 28일에 발행(發行)하면 10월 초7일의 제사에 안심하고 치재(致齋)할 수 있겠는가? 말 위[馬上]에서 재계하는 것도 또한 불가하고,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장사언(張思彦)을 가두었으니, 그 직책을 삼가지 못하여 택일(擇日)을 잘못한 때문이다.”하였다. 성석린 등이 다시 청하였으나, 명령을 얻지 못하였다. 
집의(執義) 조휴(趙休)와 지사간(知司諫) 조서(趙敍) 등이 태종에게 고묘(告廟)하려고 가는 길에 태종이 백관(百官)과 의장(儀仗)을 버리고, 단기(單騎)로 사냥하며 행하는 것은 재계(齋戒)에 맞지 않음을 간하였다.
태종이 택일의 잘못됨, 태상왕의 상태, 대간의 말 등을 근거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음을 사인(舍人) 이회(李薈)를 불러 명령하였다. 태종이 노여움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성석린 등이 돌아가지 않기를 다시 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 6권, 3년(1403 계미 / 명 영락(永樂) 1년) 9월 28일(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