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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실 건축에 반대한 신하들에 대한 태종의 노여움

노(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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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司諫院)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윤사수(尹思修)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다시 직사(職事)에 나아가게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상소하여 토목(土木)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궁실(宮室)을 처음 헐 때에는 경들이 말이 없었는데, 이제 공사를 정지시키려고 하니, 경들이 나를 노숙(露宿)하게 하려는 것인가? 내가 한양(漢陽)으로 돌아가겠으니, 서운관(書雲觀)으로 하여금 떠날 날을 점치어 알리라.”하였다.
사수 등이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 등을 용렬하고 더럽다 하지 않으시고 좌우(左右)에 두신 것은 곧은 말[讜言]과 강직한 의논[鯁論]을 들어서 궐루(闕漏)를 보충하려 한 것이오니,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신 등이 감히 마음에 있는 바를 다하여 총우(寵遇)의 은혜를 보답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역대의 재이(災異)를 상고하여 보면, 하늘이 인군(人君)을 일깨우고 두려워하게 하여 난(亂)을 그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제왕이 만일 하늘의 꾸지람이 있으면, 몸을 삼가고 허물을 자책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감하고, 부역[徭役]을 정지하고, 세금 거두는 것을 적게 하여, 인심을 위로하고 재변(災變)을 없앴습니다. 그러므로 자성(自省)할 줄 모르면 상패(傷敗)가 이르는 것이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간섭할 때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한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 때에 일식(日蝕)이 있고, 지진(地震)이 있고,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고, 혜성이 여러 번 나타나고, 비와 눈이 시기를 바꾸고, 복사와 오얏이 겨울에 꽃피고, 궁궐이 여러 번 불타 변괴의 나타남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는데, 문제가 천심을 잘 받아서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하여, 위(位)에 있은 지 20여 년 동안에 궁실·원유(苑囿)·거마(車馬)·복어(服御)를 더 늘린 것이 없고, 몸에는 익제(弋綈)를 입고, 궁인(宮人)은 옷을 땅에 끌지 않고, 유장(帷帳)에는 무늬와 수놓은 것이 없이 오로지 덕으로써 백성을 교화시킴에 힘을 썼고, 경제가 위(位)를 이으매, 절약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사랑해서, 능히 전왕(前王)의 업(業)을 지키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변이(變異)가 있었으나 마침내는 그 응험(應驗)이 없었고, 70년 동안 나라가 편안하고 집마다 넉넉하며 사람마다 족(足)하여 부강한 정치를 이룩하였으니, 이것을 이룬 것은 진실로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고, 다만 용도(用度)를 절약하고 백성을 아끼는 한 가지 일에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수창궁(壽昌宮)이 불타고, 동서(東西) 양계(兩界)에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고, 강물이 중간에 끊기고, 압록강(鴨綠江)의 물이 얕아지고, 숯비[炭雨]가 내리고, 돌이 저절로 구르고, 서리와 우박이 때를 잃고, 별과 달이 도수(度數)를 잃었으니,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여 경계하고 조심해서 재변을 없애려 하여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이제 무일전(無逸殿) 이하 수십여 채[楹]를 헐어 치우고, 그 기지(基地)를 넓혀 공사를 일으키고 경기(京畿) 안의 백성들을 노동시켜 재목을 운반하니, 이는 백성을 부릴 때가 아닙니다. 지난날 궁궐의 성을 쌓는 역사로 인하여 백성들의 곤(困)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부로(父老)들이 눈을 비비고 소식(蘇息)하기를 기다렸사온데, 어째서 거듭 전하의 적자(赤子)를 곤하게 하십니까? 또 이 땅은 치우쳐 성남(城南)에 가깝고, 비습(卑濕)하고 좁아서, 법궁(法宮)을 세워 만세(萬世)에 전할 수 없습니다. 전자에 세운 궁실이 또한 백관의 조회를 받을 수 있고 빈객(賓客)을 접대할 수 있습니다. 신 등이 헐지 않았을 때에 말하지 못하여 이에 이른 것을 한(恨)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만 작은 궁전을 세우게 하여 한때의 거둥에 필요한 이궁(離宮)을 삼으시고, 크게 역사(役事)를 일으키어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옛적에 한 문제(漢文帝)가 열 집의 재산을 아껴 노대(露臺)를 짓지 않았는데, 지금의 경비(經費)가 어찌 열 집의 재산만 되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나라에 3년의 저축이 없고, 덕수궁(德壽宮)·인덕궁(仁德宮)의 영선(營繕)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또 토공(土功)을 일으키시니, 공구 수성(恐懼修省)하고 절용 애민(節用愛民)하는 도(道)가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문제(文帝)·경제(景帝)의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하게 한 정사를 본받으시어, 재변을 없애고 화기(和氣)를 부르소서.”하였다.
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 등이 대궐에 나아오니, 임금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며 말하기를, “한양(漢陽)으로 향하는 날을 기다려서 만나자.”하였다. 사형 등이 황송하고 두려워서 물러갔다.
이튿날 영사평(領司平) 하윤(河崙)·판승추(判承樞) 조영무(趙英茂)·참찬 문하(參贊門下)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이른 아침에 대언사(代言司)에 모이어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으로 하여금 한양으로 이어(移御)하는 것을 정지하고, 궁궐을 영건(營建)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영사평(領司平)과 의정부가 와서 내 뜻을 엿보는가?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곧 나가라.”하였다. 윤 등이 나가지 아니하고 한참 동안 뜰에 서 있으니, 임금이 석명을 불러 순군 만호(巡軍萬戶) 이직(李稷)에게 명하기를, “빨리 낭사(郞舍) 등을 가두라.”하였다.
윤이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어찌하여 사람을 이기려고만 힘쓰시는가? 인군(人君)의 덕은 광대하게 포용하는 것이 제일이다.”하고, 조영무(趙英茂)에게 눈짓하여 민무질(閔無疾)에게 이르기를, “공(公)들은 광구(匡救)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가? 마땅히 곧 들어가서 고(告)하라.” 하였다. 무질이 말하기를, “문을 지키는 자가 있으니, 어떻게 들어가느냐?”하니, 윤이 한탄하여 말하기를, “예전 사람은 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간 자가 있었다.” 하였다. 무질이 이에 들어가니, 임금이 꾸짖기를, “너는 왜 왔느냐? 너의 재덕(才德)으로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하고, 문지기[閽寺]를 꾸짖어 말하기를, “어째서 이 사람을 들여보냈느냐?”하였다.
조금 뒤에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 등이 이르러서 간관(諫官)이 갇혔다는 말을 듣고, 무가 탄식하기를, “주상께서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후세에 오늘을 어떻다 하겠는가?”하였다. 윤이 말하기를, “지금 간신(諫臣)이 다 곧은데, 주상의 노하심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윤과 무가 다시 석명을 시켜 청하기를, “간관(諫官)을 가두는 것은 예전의 도리[古道]가 아니니, 원컨대 다른 사람으로 바꾸소서.”하였다. 직이 아뢰기를, “부관(府官) 이숙번(李叔蕃)은 병으로 앓고, 김승주(金承霔)는 기일(忌日)을 만나 신(臣)만이 홀로 부(府)에 있사오니, 원컨대, 부관(府官)을 더 정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형벌을 가하여 국문하고자 하겠는가? 다만 초사(招辭)만 받게 하는 것이니, 경이 혼자서 다스리라.”하고, 또 석명(錫命)을 시켜 윤과 무에게 명하기를, “경들의 말은 따를 수 없다.”하고, 또 직에게 명하기를, “간관(諫官)의 소장(疏狀) 안에 ‘압록강(鴨綠江)의 물이 얕아졌다’고 말하였는데, 대저 강물이란 얕아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 강의 물이 지금 얕아진 것인가? 또 말하기를 ‘기내(圻內)의 백성이 노동(勞動)이 심하다’ 하였는데, 오늘날 역사하는 것은 모두 승군(僧軍)들이다. 어느 고을 백성이 이 역사로 인하여 노동 하는가? 또 궁터를 넓힌다고 하였는데, 낭사(郞舍)들이 누구의 말을 듣고 내가 궁전을 크게 하려는 뜻을 알았는가? 또 여러번 천변 지괴(天變地怪)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천변 지괴는 궁실을 경영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두어 가지 조목으로 국문(鞫問)하면 반드시 수창(首唱)한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붓을 잡고 소(疏)를 초잡은 자가 있을 것이니, 끝까지 추궁하여 아뢰라.”하였다.
직이 아뢰기를, “형벌을 하지 않고 어떻게 진정을 알 수 있습니까? 형벌을 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무가 아뢰기를, “주상께서 신 등과 더불어 동맹(同盟)하고 공신(功臣)을 삼았는데, 지금 신 등의 말을 듣지 않으시니, 이와 같이 하시면 간관(諫官)이 없어질 것입니다. 간관이 없으면, 나라는 나라 꼴이 아닙니다.”하고, 곧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윤이 말하기를,“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한번도 실덕(失德)하신 일이 없는데, 지금 실덕하는 것이 이와 같다.”하였고, 사형·영무·직·석명이 모두 울었다. 윤과 무가 다시 석명에게 이르기를, “이 일을 신 등이 말리지 못하면, 뒤에 큰일이 있으면 누가 능히 바로잡을 것인가? 신 등이 말로써 다시 주상께 여쭙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석명이 주상의 노여움이 심하여 다시 아뢰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윤과 무가 다시 들어가서 여쭙기를 청하니, 석명이 나와서 말하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던 일을 자세히 아뢰었더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씀하시기를, ‘낭사(郞舍) 등은 그 죄가 깊지마는, 공신(功臣)들이 이같이 극진히 말하니, 내 어찌 듣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하였다. 윤·무 등이 모두 기뻐하였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다시 석명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재상(宰相)은 모두 집이 있는데, 나는 집이 없다. 낭사(郞舍)의 말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 같기로, 내가 그 죄를 추문(推問)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 대신과 공신들이 진언(盡言)하여 내가 들어주기를 바라니, 내가 감히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낭사의 죄는 경들이 결단하라.”하였다.
조금 있다가 명령을 내리기를, “좌사간(左司諫) 윤사수(尹思修)는 경상도로 귀양보내고, 우사간(右司諫) 김첨(金瞻)은 전라도로 귀양보내고, 지사간(知司諫) 성발도(成發道)·좌헌납(左獻納) 권훈(權壎)·우헌납(右獻納) 한승안(韓承顔)은 각각 본향(本鄕)으로 귀양보내라.”하였다.
윤과 무가 “도로 그 직책을 맡기는 것이 제일 좋고, 각각 그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그 다음이라.”하여, 다시 석명을 시켜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한양(漢陽)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은 간관(諫官)을 책(責)하기 위한 것이었다. 태상왕께서 이미 이 도읍에 오셨으니, 내가 어찌 홀로 한경(漢京)을 좋아하여 도로 가겠는가?”하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한 것이 아이들 장난이다. 나도 역시 나의 노한 것이 그른 줄을 안다. 다만 내가 본래는 조그마하게 궁실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간관들이 나더러 크게 전우(殿宇)를 세운다고 하므로, 내가 파(罷)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경들이 전일(前日)에는 아무 말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조금 노여워서 사수(思修)·김첨(金瞻)을 영표(嶺表)에 귀양보내어 오래도록 부르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하였다.
석명이 아뢰기를, “의정부에서 전일에 합좌(合坐)하여 궁궐을 지을 일을 의논하였었는데, 주상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상달(上達)하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리어 말하기를, “공신(功臣)들이 이처럼 간청하니, 내가 용서하겠다.”하고, 석명을 시켜 사수·첨 등을 불러 그 죄를 설유(設諭)하고 모두 용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조(營造)하는 일은 공론(公論)대로 하라.”하여, 사형·무 등이 곧 조성 관원(造成官員)을 시켜 역군(役軍)을 거느리고 역사(役事)에 나가게 하였다. 조금 뒤에 호야(呼爺) 소리가 궐내(闕內)에 진동하였으므로, 사형 등이 곧 물러갔다. 
태종이 한양으로 이어하겠다고 이야기하며 정승 김사형 등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정승 김사형 등이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이튿날 영사평(領司平) 하윤(河崙)·판승추(判承樞) 조영무(趙英茂)·참찬 문하(參贊門下)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이른 아침에 대언사(代言司)에 모이어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으로 하여금 한양으로 이어(移御)하는 것을 정지하고, 궁궐을 영건(營建)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이에 태종은 크게 노하며 영사평과 의정부 등이 내 뜻을 엿보느냐며 화를 낸다. 그리고 박석명을 불러 순군 만호(巡軍萬戶)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낭사(郞舍) 등을 가두라고 명하였다.
태종은 계속해서 화를 풀지 않았다. 영사평(領司平) 하윤(河崙)·판승추(判承樞) 조영무(趙英茂)·참찬 문하(參贊門下) 이직(李稷) 등이 눈물을 흘리며 태종에게 이야기를 하자, 태종은 낭사(郞舍) 등의 죄는 깊지만 공신(功臣)들이 이같이 극진한 말을 하니 듣는 것임을 밝힌다. 최종적으로 태종은 “공신(功臣)들이 간청하니, 내가 용서하겠다.”라고 하며 노여움을 풀고 낭사의 죄도 설유(設諭)하고 모두 용서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7월 23일(경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