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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가의 민전 탈취에 대한 황해도 감사 홍처윤(洪處尹)의 분개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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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상의 건강을 물으니, 상이 이르기를, “눈꺼풀이 빨갛게 무르고 습창(濕瘡)도 심하다.”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습창은 온천 물에 목욕하시면 필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어 양남(兩南) 진휼 어사의 장계(狀啓)를 내주고 홍명하(洪命夏)에게 읽게 하였는데, 명하가 읽기를 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오정언(吳廷彦) 같은 자는 미관 말직의 신분인데 그에 대한 포계(褒啓)가 누차 올라 왔으니 가상하다.”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그의 성명을 기억하셨다가 발탁해 임용하시면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족히 용동(聳動)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밀양(密陽)과 상주(尙州)의 두 수령이 가장 공로가 뚜렷한 듯한데 어떤 상을 주어야 좋겠는가?”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가자(加資)하는 것은 너무 지나칠 듯싶습니다.”하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이지온(李之馧)과 이성기(李聖基)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匹)씩 하사하는 것으로 써서 판부(判付)하게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쓸 만한 무사가 아주 적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예를 조금 느슨하게 하는 대신 강(講)하는 규정을 강화하면 쓸 만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무사는 응당 힘과 기운을 첫째로 삼아야 하는데, 어떻게 무예를 헐겁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인조조(仁祖朝) 때 신경진(申景禛)과 이서(李曙) 등에게 명하여 무예를 권장하게 한 결과 상당히 많은 인재를 얻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판도 그때의 일을 눈으로 보았던가?”【이때 이완이 공조 판서였다.】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때 권무청(勸武廳)이라 이름하고 무사를 가려 무예를 단련시켰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그때처럼 하도록 하라.”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근래 인재가 부족한 까닭에 선전관(宣傳官)에 결원이 생겨도 의망(擬望)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하니, 두표가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아뢰기를, “이것은 그동안 병판을 역임한 자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어떻게 그들이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병판으로 있는 자가 미리부터 배양해 놓고 쓸 때에 가서 조발(調發)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인재가 부족하다고 진달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날 무사들을 대우하는 것이 너무도 야박합니다. 그리하여 비록 무변(武弁)의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문과(文科)에 올라서고 나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심하게 무사들을 짓밟는데, 무사가 의욕을 잃는 이유가 미상불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는 이때에 무비(武備)가 이토록 허술하기만 하니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의 중군(中軍) 이수창(李壽昌)을 외임(外任)에 임명해 놓고도 오래도록 교대할 인물을 내지 못했는데, 이는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현(鄭傅賢)을 후임자로 삼고 싶은데 현재 고신(告身)을 빼앗긴 상태라서 계하(啓下)되지 못하고 있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부현의 직첩(職牒)을 도로 내주도록 하라.”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이수창을 그대로 머물러 있게 계청했어야 마땅한데, 안마(鞍馬)가 다 떨어질 정도로 오래 서울에만 있었으니, 줄곧 여기에만 머물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번에 옥당이 면세전(免稅田)을 혁파하고 직전제(職田制)를 부활시킬 일을 계달(啓達)했었는데, 오늘 여러 재신(宰臣)이 입시했으니, 품정(稟定)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전제를 부활시키는 것과 면세전을 혁파하는 것은 본래 성격이 다른 일인데 왜 뒤섞어 말하는가?”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궁가(宮家)의 면세전을 보건대, 1천 4백 결(結)이나 되는 곳도 있는데, 요즘 올리는 장소(章疏)마다 모두 이 일을 언급하고 있으니, 듣고만 있기에도 매우 괴롭습니다.”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짜증내는 기색이 역연하였는데, 이내 호조의 회계(回啓) 1통을 내주며 이르기를, “이 계사는 너무도 근거가 없다. 절수(折受)한 선후(先後)나 사리의 곡직(曲直)은 따지지도 않고 그저 내 준 것만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회계한 당상을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하였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가 전석(前席)에 입시했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물러나갔다. 태화가 아뢰기를, “설령 회계에 착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궁가(宮家)의 일에 관계되어 중벌(重罰)을 당하기까지 한다면, 먼 외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할 것이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파직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하고, 두표와 유성도 서로 잇따라 진달드렸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삼공이 일시에 일어나 절하고 청하기를, “신들이 간절하게 진달드리는데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실 경우, 사람들이 필시 말하기를 ‘궁가에 관계된 일로 서원리를 파직시켰는데 삼공이 극력 간쟁했어도 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진달드리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그 명을 환수한다면 어떻게 뒷날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이 일마저 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신들은 정말 면목이 없게 됩니다.”하고,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삼공의 말을 쾌히 따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한참 깊이 생각한 뒤에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파직시키지는 말고 추고만 하라.”하였다.
이에 앞서 숙정(淑靜)·숙안(淑安) 두 공주가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라는 핑계를 대고 신천(信川)·재령(載寧)·평산(平山) 등지의 민전(民田)을 불법으로 탈취했는데,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공갈 협박하는 말에 겁먹은 나머지 아첨할 목적으로 꾀를 내어 허다한 민전을 모조리 궁가의 소속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이에 본도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분개함을 금하지 못해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자 호조에 계하(啓下)하였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와 참의 홍처후(洪處厚)가 매우 원통한 민사(民事)라고 회계(回啓)하면서 이정두(李廷枓)와 임전(林荃)이 서로 짜고 악행을 저지르며 문기(文記)를 위조한 정상을 낱낱이 진달드리고, 또 허다한 화전(火田)을 일구어 경작하여 먹고 산 지 30년에 이른 것도 있으니 주인없는 진전(陳田)으로 논할 수는 없다는 것과 감영(監營) 소속의 화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역시 중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둘 다 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진달드렸기 때문에, 상이 진노하여 이렇게 미안한 분부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신이 호조에 있으면서 잘못 회계한 죄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황송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이번 일을 회계할 때에 혐의가 있어 동참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같이 끼어 듣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서원리와 같이 추고를 받게 해주소서.”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어 대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서원리가 규례(規例)를 몰라서 그런 것인가?”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원리가 규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요즘들어 연소한 무리가 모두 ‘궁가에 관계된 일은 곡직(曲直)을 따질 것 없이 백성들에게 내 주어야 마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원리의 말이 자연 이런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된 것입니다.”하였다. 원두표가 또 아뢰기를,“이시술(李時術)의 집에서 뇌물로 준 물건이 무수한데 집을 팔기까지 했는데도 다 갚지 못하였다 합니다. 이전에 조신(朝臣)이 이런 환란을 당했을 경우에는 으레 약간의 물품을 지급해 주곤 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대로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정치화가 5백 금(金)을 지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표는 전석(前席)에서 말할 때마다 두서가 없었고 거만하기 짝이 없었으며 제신(諸臣)을 곤욕스럽게 하면서 참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사를 배양하지 못한 책임을 전후의 병판(兵判)들에게 떠넘기려 하였는데 이는 그의 의도가 음험한 것을 보여주는 곳이요, 서원리가 회계한 것을 연소배의 의향이라고 하면서 시기를 틈타 모함하려고 꾀했으니 이는 유감을 푸는 동시에 총애를 굳히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심지어 무장(武將)의 안마(鞍馬)가 너절해졌다는 설까지 내놓은 것은 비루하고 패려하기 그지없는데, 그는 장차 이수창(李壽昌)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탐람한 행동을 하여 제몸을 살찌우게 하려고 한 것인가.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입을 꾹 다문 채 물러났으므로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숙정(淑靜)·숙안(淑安) 공주가 신천(信川)·재령(載寧)·평산(平山) 등지의 민전(民田)을 불법으로 탈취하였고,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이를 주도적으로 주도하여 백성들이 생업을 잃은 것에 대해서 분개하였다.
황해도 감사가 궁가의 민전 탈취에 분개하여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현종 5권, 3년(1662 임인 / 청 강희(康熙) 1년) 7월 13일(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