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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묘호란 이후 ‘이인거의 모반사건’에 나타난 이인거의 분개

노(怒)
부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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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감사 최현(崔晛)이 공술하기를, “신은 역적의 괴수 이인거를 평소에 전혀 몰랐으나 제법 고사(高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며 성상께서도 우대하는 예를 가하여 자주 음식을 제급(題給)하라는 전교를 내리시기에 신도 찬물(饌物)을 보냈었습니다. 지난해 겨울에 인거가 찾아와서 신에게 사례하므로 신이 비로소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인거가 홍보(洪靌)와 신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 중에 불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홍보가 신에게 ‘인거의 편지에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라는 등의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신이 ‘나도 괴이쩍게 여긴다.’ 하였으며, 답장에는 대략 안부만 물었을 뿐이니, 그러한 괴이한 말에는 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순심(巡審)하며 횡성에 이르자 홍보도 함께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인거가 사람을 보내어 ‘상소를 하기 위해 어제 읍내에 와 있다.’고 전하기에, 신이 내일 가서 만나보겠다고 답하였습니다. 홍보가 신에게 ‘아침에 인거를 만나 상소하는 까닭을 물었더니, 장차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하는데, 군사 2백여 명을 얻었다고 하더라.’고 하기에 신이 ‘적이 경내에 없으니 지금은 의병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하니, 홍보는 또 ‘군기와 군량을 어디서 마련하겠는가고 물으니, 인거가 「호서와 호남에 가서 빌리고자 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 적을 토멸하려 하는데 수령으로서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따르지 않는 자는 마땅히 참수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과 현에 사는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에게 ‘일찍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모두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얼마 후 인거가 들어오기에 신이 ‘너의 상소하고자 하는 바가 무슨 일이냐?’ 하였더니, 인거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오랑캐와 강화를 하여 예의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되게 되었으므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해 상소하고 창의하여 적을 토멸하고, 상경하여 숙배한 후에 강화를 주장한 간신 참수하기를 청하고, 이어 서쪽으로 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적이 이미 물러갔는데 어디서 싸울 것인가?’ 하니, ‘胡의 사신을 참수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胡의 사신을 참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적이 만약 대거(大擧)하여 나오면 그 2백 명 의병으로 대적해낼 수 있겠는가? 또 간신 참하기를 청한 것이 옛날에는 혹 있었지만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한 일도 있었던가?’ 하니, 인거가 나가버렸습니다. 신이 홍보와 이탁남 두 사람에게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멸하고 간신 베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이는 임금의 측근에 있는 간악한 무리를 숙청한다는 것을 빌미로 하는 짓과 다름이 없으니, 곧바로 체포하여야 하는데, 그 사람은 중한 명망이 있는 데다 종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문답한 말만으로 잡아 치죄하겠다고 계문(啓聞)하면 조정에서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처사(處士)를 무함하여 죽였다고 할 것이니, 그 실상을 가지고 치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신이 홍보·이탁남과 함께 인거를 찾아갔더니, 인거가 상소의 초안을 꺼내어 보여주기에 신이 말하기를 ‘소의 내용 중 군사를 일으켜 간신을 죽인다는 등의 말은 조정에서 들어줄 리가 만무한데, 허락하기 전에는 결단코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중지할 것을 반복하여 말하였습니다. 인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상소의 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갈 길이 바빠서 먼저 일어나며 은밀히 홍보와 이탁남에게 부탁하기를 ‘알려야 할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즉시 통지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홍천(洪川)에 이르러 시열(試閱)할 때에 인거의 소가 이르렀는데, 그 소의 내용에 현저하게 패역한 말은 없었습니다. 만약 받지 않고 물리치면 저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되겠기에 그 소를 받아 보냈습니다. 장계에 이른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그 때가 아닌 듯한데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조정에서 미리 그 정상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횡성현 문보(文報)에 ‘현감이 원주에 가 있는데 인거의 아들이 군기(軍器)와 활 30여 장을 훔쳐 냈으나 금지시키지 못하였다.’고 하였기에 신은 이에 그가 군사 일으킨 것을 알고 비로소 치계(馳啓)하였으며, 얼마 후 홍보와 이탁남 두 사람의 보고를 보고는 또 치계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군관이 와서 ‘인거는 단지 그의 무리 30여 명과 관노 영수(永壽)의 집에 있었는데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 원주의 군사가 그 집에 달려 들어가 일시에 생포하는 것을 목격하고 왔습니다.’ 하기에 신은 또 그러한 내용을 치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홍천에 머물면서 적들을 모조리 다 잡기를 기다려 원주로 이송하였고, 괴수의 처자를 횡성현에 가둔 후에야 춘천으로 나갔습니다.
신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밝지 못하고 지나치게 사람을 믿어 미리 인거의 역모하는 정상을 알아서 사전에 잡아 다스리지 못하였고, 또 제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가서 체포하지 못한 것 등의 죄는 실로 달갑게 받겠습니다. 신이 홍보·이탁남과 서로 밀약(密約)하여 시종 함께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들은 대로 치계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동정을 살피면서 군사를 정돈하고 계책을 세워 기회를 틈타 나아가 소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인거가 횡성에서 군사를 모을 때에 이탁남은 원주에 있었고 신은 홍천에 있었는데, 횡성에서 원주의 거리는 40리이고 홍천과는 70리로서, 본현에서 먼저 원주에 보고하여 신에게 전보(轉報)하였으니, 사기(事機)의 완급(緩急)과 장계의 선후는 형세상 면키 어려운 것입니다. 신의 실정을 남김 없이 밝혔습니다.” 하였는데, 국청에서 상이 관대하고 인자하여 최현을 죽이지 않을 것을 알고는 곧바로 조율하기를 청하고 형신(刑訊)을 청하지 않았다. 상이 처음에는 옥사의 체모를 잃은 것으로써 전교하였으나, 금부에서 사죄로 결단하자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양사에서 해를 넘기도록 고집하여 논란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오랑캐와 강화를 맺자 이인거는 예의의 나라가 오랑캐가 된 것에 대해서 분개하며 상소하였다.
10월1일, 이인거의 상소가 조정에 도착했는데, 이인거는 호란을 맞아 적과 맞서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오랑캐 사신의 접대나 일삼고 눈치만 살펴 천지와 귀신이 공분(公憤)하고 나라가 견융(犬戎)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일갈하며 자신에게 병권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호서와 호남의 군기와 군량을 빌려 적을 토벌하고 오랑캐와 화친하도록 한 간신을 척결하려고 하였다.
인조와 조정이 놀라 서울과 경기도의 병력 수천을 동원하여 전진시키고 궁궐을 호위하며 동대문에서 횡성에 이르는 길마다 정탐병을 배치하여 이인거의 무리를 잡아들이고 이인거는 유배 보내면서 이인거는 화를 풀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인조 17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10월 5일(무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