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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질서를 부여하나?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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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관념은 분노의 발생과 관련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권리 의식이 질서 관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질서를 상상하느냐에 따라 권리 의식은 달라지며, 그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달라진다. 예컨대, 신을 정점으로 하여 지상의 모든 만물이 수직으로 그 등급을 달리하여 늘어서 있다고 생각할 때, 각각의 피조물이 마땅히 가지는 권리는 차등적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신을 정점으로 하지만 지상의 모든 만물이 신 앞에 평등하게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각각의 피조물이 마땅히 가지는 권리는 동등하다. 가족을 예로 들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쉽겠다. 자식들 사이에 어떤 질서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식들에게 마땅히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권리가 달라진다. 옛날에는 장남과 차남의 권리가 달랐고, 아들과 딸의 권리가 달랐다. 그런 차등적 권리 부여는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자식들 사이의 위계적 질서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런 상이한 질서 관념이, 단순화해서 말하면, 근대 사회와 전근대 사회를 가른다.) 그러므로, 분노가 권리의 침해에 대한 인식과 관련될 때, 그것은 또한 일정한 질서 관념과 관련된다. 질서order는 다른 말로 하면 차례이고 순서이다. 그것은 또한 계급과 위계의 존재를 함의한다. 사과 열 개가 앞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일렬로 세워보자. 무슨 순서대로 세울까? 큰 것부터 작은 것 순서로? 색깔이 붉고 진한 것부터 그렇지 않은 순서로? 혹은 그 반대 순서로? 아니면 무작위로? 사과를 이른바 ‘순서대로’ 늘어놓는 방법이 나에게는 몇 가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사실 목적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사람은 상품가치가 높은 순서대로 사과를 쉽게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사과들은 상품가치에 따라 분류되고, 그렇게 분류된 사과에는 가격이 등급처럼 매겨질 것이다. 예컨대, 두 개에 천 원, 세 개에 천 원, 그리고 다섯 개에 천 원. 그렇게 분류되어 순서대로 늘어서 있는 사과는 상인에게 질서 있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그런데 그 상인의 어린 손녀가 나타나서 그 상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사과의 배열을 바꾸어 놓았다고 가정해보자. 상인은 새롭게 배열된 사과에서 처음에는 별 다른 질서를 발견하지 못하고서 정렬된 상품을 흩뜨려 놓았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손녀가 사과를 다르게 배열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상인은 이제 그 사과의 배열에서 나름의 질서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인은 사과를 팔기 위해 사과의 배열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상인은 사과에 질서를 부여했고, 손녀는 (상인이 보기에) 그 질서를 파괴했다. 무질서해진 것이다. 그러나 손녀가 그것이 ‘무-질서’가 아니라 다만 ‘다른-질서’임을 설명하자, 할아버지는 그것이 질서일 수도 있겠다고 인정하지만, 다시 원래의 질서로 되돌린다. 이 예에서는 그래도 질서를 무너뜨린 사람이 예쁜 손녀이기에 할아버지가 화도 그나마 덜 내고, 손녀의 설명도 들어주고, 질서일 수도 있겠다고 인정해주지만, 현실에서는 설명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질서라는 것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분노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데 ‘원래의’ 상태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왜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 걸까? 흔히 사람들은 기존의 상태나 과거의 상태를 원래의 상태라고 부르면서 변화에 반대해 그 상태로의 회복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기존의 상태나 과거의 상태가 그 자체로 원래의 상태는 아니다. 기존의 상태나 과거의 상태가 잘못된 상태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손녀가 사과의 배열을 흩뜨려 놓기 전에 상인이 애초에 사과를 잘못 배열해 놓았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과거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 옳은 일일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옳은 일이 되려면, 그것은 사물들을 애초의 목적에 맞게, 이 경우에는 상품가치에 따라, 바르게 배열해 놓는 것이어야 한다. 원래의 상태란 시간과 무관하게 올바른 상태이며, 그것은 원래의 목적이 실현된 상태이다. 그런 상태를 사람들은 과거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신과 자연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예컨대, 기독교에서는 신이 태초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했고 피조물들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했으므로 그 질서에 따른 상태가 올바른 상태이고 회복해야 마땅한 원래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창조자 신의 자리에 자연을 놓으면 성리학적 또는 자연법적 주장이 된다. 이때, 올바른 상태와 원래의 상태는 신과 자연의 이름 아래 마치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러나 자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신이 세상에 어떤 목적을 부여했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그런 선험적으로 올바른 상태의 모습조차 철저히 누군가의 경험적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근대인들의 비판이었다. 불평등한 남녀관계와 신분제도가 옛날에 신과 자연의 이름으로 옹호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불합리성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사실은 원래의 올바른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관습적인 것을 원래의 올바른 상태라고 나중에 정당화했던 것이다.  
 
공진성, <공적 분노의 소멸>,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44-47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44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