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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언제 짜증내고, 언제 분노하나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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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라는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짜증과 분노를 비교해 보려고 한다. 짜증과 분노는 어떻게 다를까? 우리는 찌는 듯한 무더위에 대해 짜증은 내지만 분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무더위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면 결코 짜증만 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선진산업국가들이 지금껏 지구를 마구잡이로 개발해온 탓에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온난화가 일어났고, 그래서 지금 이토록 더운 것이라고 누군가가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무더위에 그저 짜증만 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분노할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블랙아웃의 위험이 있다고 해서 에어컨 사용의 억제를 정부가 강제할 때, 그것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짜증은 내더라도 분노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정부의 잘못된 정책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게다가 그 문제를 정부가 가정용 전기요금만을 인상하여 해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짜증만 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분노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보다 인식 여부이다. 사실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면 소용 없고,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인식하면 분노가 유발되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또 생각해 보자. 공원이나 극장에서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가 슬쩍 내 앞에 설 때, 식당에서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종업원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을 때, 화장실에 사람이 많아서 오래 기다려야 할 때, 우리는 짜증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의 원인을 다르게 인식한다면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공원이나 극장에서 누구는 새치기를 하더라도 어쨌든 줄을 섰다가 표를 구입해 들어가는데, 다른 누구는 (예컨대 사장 아들이나 정치인이나 깡패는) 표 값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 바로 입장한다면, 또는 바빠서 손님을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는 줄 알았던 종업원이 백인 손님은 친절하게 바로 응대하고 유색인인 나만 홀대한다면, 또는 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여자화장실 앞에만 있고 남자 화장실 앞에는 없다면, 우리는 짜증을 넘어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짜증과 분노는 어떻게 다른 걸까? 내 생각에 짜증은 자기의 권리 실현이 일시적으로 방해받을 때에 느끼는 감정이고, 분노는 자기의 권리 실현이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좌절될 때에 느끼는 감정이다. 무더위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체온의 유지는, 17세기의 정치철학적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자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이자 권리, 즉 자연권이다. 그 권리를 인간은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키려고 노력한다. 무더위 때문에 그 권리의 실현이 일시적으로 방해받을 때에 인체는 본능적으로 짜증을 느끼고 가능한 대로 그 권리를 지키려고, 즉 체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짜증은 인체의 센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하나의 부수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노력이 체계적으로 방해받을 때, 즉 어떤 방해가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겨질 때, 인간은 분노하게 되고 권리의 수호를 위해 구조적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공진성, <공적 분노의 소멸>,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41-43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4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