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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를 느끼지 못하다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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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거의 8년 만에 방학을 맞아 다시 유럽을 방문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분노에 관한 글 한 편을 쓰기로 약속했다. 그때 나는 그 글을 유럽에 머무는 동안에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유럽에 와 보니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노느라 바빠서, 작업 환경이 좋지 않아서, 필요한 자료들이 주변에 없어서도 그랬지만, 다른 무엇보다 먼저 분노가 느껴지지 않아서 글을 쓸 수 없었다.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분노에 대해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 물론 자잘한 짜증들은 느껴졌다. 그러나 분노라고 할 만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한국 사회를 떠나 있기 때문일까? 그럴 수 있겠다. 그렇다면, 현재 머무르고 있는 프랑스 사회나 독일 사회에 대해서는 왜 별 다른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 잘 몰라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머리로는 분명히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문제들과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것은 어쩌면 머리가 아니라 몸일 듯싶다. 때마침 휴가철이어서 도시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비교적)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상인들만 있으며, 텔레비전과 같은 현지의 대중매체를 통해 뉴스를 접할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접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조금 알아듣는다고 하더라도 번역의 과정에서 많은 문화적 요소들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Lost in Translation!), 좀처럼 현지의 사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고, 그래서 또한 분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분노’라는 주제를 만난 것이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해 전에 출판사를 운영하는 선배로부터 분노에 관한 책을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스테판 에셀의<<분노하라>>가 프랑스에서 출간되기도 전인 것 같다. 그때 나는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그 감정이 스피노자적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병리적 현상이므로 개인에게나 사회에 유익하기보다 해롭다고 생각해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 ‘분노’라는 키워드가 다분히 선동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분노가 좋은 감정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분노하라’고 권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그런 권유의 존재와 무관하게, 때로는 분노를 느끼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그 평범한 사실을 나는 2013년 여름에 대한민국을 잠시 벗어났다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 감정의 정체, 이 감정의 드나듦의 원인과 방식에 대해 한번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진성, <공적 분노의 소멸>,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39-41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39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