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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혁명은 가능한가?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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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고 그래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정당성과 이해관계를 주장하며 서로에 대해 분노하는 관계.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기업을 통해, 교육을 통해, 교회를 통해, 언론과 방송을 통해, 법을 통해, 그리고 군대와 경찰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사회생활 속에 선동, 유포, 관철, 재생산하고 있는 경쟁이라는 살육적 윤리학과 다른 것일까? 지난 30여년의 신자유주의 역사는 어떤 계급적 사랑, 어떤 계급적 분노도 사전에 전제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경쟁의 윤리학이 지배적으로 되고 일반적인 것으로 되면서 분노의 감정은 점점 특정한 방향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무차별적인 방향으로 자극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의 윤리학>에 대한 어떤 영화평은, 분노가 폭발하여 무차별적 파멸이 발생한 곳의 이름이 로코코 스튜디오임을 들어 이 영화가 로코코의 종말을 가져온 프랑스 혁명을 상기시키며 우리 시대가 혁명의 전야에 있음을 암시한다고 쓰고 있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양식으로서 1700년부터 그 세기의 말까지 유행했다. 그것은 환상, 쾌락, 즐거움, 도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금욕, 근면, 노동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적 자본주의와 사실 재현에 충실한 예술적 사실주의가 나타나 로코코 양식을 대체했다. 요컨대 로코코를 끝낸 것은 혁명이었다. 영화는 희생자 진아의 분노를 삭제했지만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분노는 여러 기생계급들 뿐만 아니라 생산계급들 내부에도 가득차 있다. 분노의 전 사회적 일반화를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프랑스 혁명이 낳은 새로운 질서인 자본주의 양식의 마지막 국면일까? 그것을 마지막의 것으로 만들 혁명, 과거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새로운 혁명이 지금 가능하거나 실재하는가? 권력, 화폐, 존엄, 쾌락의 사유화를 위해 자극되는 분노가 이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시대에, 새로운 혁명이 가능하거나 실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실존하는 분노의 감정들을 동력으로 삼아 전개될까? 아니면 어떤 정의로운 분노, 정당한 분노의 자리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일까? 유럽의 다중들은 스테판 에셀의 생각을 전유하여 2011년의 반란에서 “분노하라. 즉각 실질민주주의를!”이라고 외쳤다. 이것이 이 분노의 시대를 변화로 이끌 표어일 수 있을까? 분노라는 수동적 감정에서 출발하여, 사랑이라는 능동적 감정으로, 실질민주주의의 구축이라는 능동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조정환, <분노의 정치경제학>,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37-38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37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