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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끄는 슬픔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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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희생자들의 입장에서, 아래로부터 분노의 문제를 관찰해 왔다. 노동계급은 자본가계급에 의해 착취되고 희생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에 의해 차별되는 방식으로 자본에 희생된다.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들에 의해 차별되는 방식으로 남성과 자본에 희생된다. 그런데 영화 <분노의 윤리학>은 분노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희생되는 것은, 미모이지만 가난한 여대생 진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희생자는 아무 말이 없다. 희생자의 죽음을 기리고 그녀의 아픔과 분노에 연대하고자 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을 채우는 것은 그녀를 희생시키는 데 연루된 사람들이며 그들이 분출하는 제 각각의 분노다. 그들은 모두 진아라는 아름답고 가난한 여성에게 기생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편집증에 사로잡혀 있다. 먼저 진아를 사랑했으나 그녀로부터 버림받은 현수. 그는 진아에 대한 자신의 짝사랑에 집착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내친 진아에 대한 분노로 그녀를 죽인다. 둘째 진아에게 돈을 꾸어주고 원금과 이자를 되돌려 받기 위해 그녀에게 매춘을 종용하는 사채업자 명록. 그는 오직 돈에 집착한다. 그는 진아를 죽인 현수에게 분노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가 진아로부터 원금과 이자를 아직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셋째 진아의 방에 몰래카메라 를 설치하고 도촬을 했던 교통경찰 명록. 그는 정보에 집착한다. 그는 자신의 도촬정보가 담긴 하드디스크를 뺏아간 명록에게 분노하여 그를 죽인다. 넷째 선화의 남편이면서 명록의 소개로 진아와 매춘관계를 맺은 수택. 그는 이득을 볼 수 있는 연줄에 집착한다. 그가 분노를 표현하는 대목은 자신이 수감된 처지에서 후배인 검사와 경찰이 선배인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고 무관심을 보인 때다. 이 네 사람은 여자, 돈, 정보, 연줄 등 자신의 이해관계가 침해되었다고 생각하며 분노한다. 그렇다면 수택의 부인 선화의 분노는 어떤가? 그녀는 얼핏보면 분노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이 네 남자를 심판하는 초월적 입장에 서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이 불륜을 저질러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 때문에 진아의 죽음 따위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며 없었던 일로 해도 좋을 정도의 것으로 느껴진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남편이 자기 외에 다른 여자와 한 번 이상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 즉 남편의 불륜행위로 인해 상처입은 자존심에 가 있다. 이 모든 인물들은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 분노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각자는 자기가 집착하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슬픔을 느끼고 그 파괴를 가져온 자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그 자를 파멸하려는 충동으로 자극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인간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시키고 인간을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끄는 슬픔의 감정의 하나이다. 영화에서 그 분노의 감정이 집중되어 폭발하는 무대가 있다. 그것은 진아가 죽기 전에 돈을 벌기 위해 반라사진 모델이 되었던 스튜디오 로코코였다. 그 새하얀 스튜디오는 분노가 폭발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광란의 유혈무대로, 붕괴의 무대로 변신한다. 밝고 깨끗한 옷을 입고 로코코에 나타나 고결한 자세로 그 사태를 심판하고 조정하던 선화도 하얀색 크리넥스로 명록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리는 잔인한 살해자로 나타난다.  
 
조정환, <분노의 정치경제학>,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35-36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35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