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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항쟁의 디딤돌, 명동성당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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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국민대회가 성공했지만 2주 이상 계속되는 6월 항쟁으로 상승,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6월 10일 시위에 참가한 학생과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4시가 넘어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발사로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는 점차 불어나 800여 명이 경찰과 팽팽하게 대치했다. 이들은 1987년 4월부터 천막농성을 벌이던 상계동 주민 200여 명과 함께 했다. 경찰이 명동성당의 출입을 봉쇄함에 따라 시위대는 농성을 계속할 것인가 해산할 것인가에 관해 논의했다. 논의 결과 “역사의 진행은 우리 예측대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이 농성은 아무리 계획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6‧10 이후 새로운 투쟁의 기점과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 시민‧학생이 함께한 이 농성은 귀중한 기회다. 이 계기를 활용해야 한다. 해산하면 어렵게 끌어올린 투쟁의 열기를 어떻게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농성을 이어가기로 했다. 5박 6일로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이 시작되었다. 11일 아침이 밝아오자 시위대는 100여 명씩 어깨동무를 하고 성당 입구 도로를 나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농성대는 성당에서 꺼내온 엠프와 스피커로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자고 방송했다. 경찰은 성당 측에 전원 연행하겠다는 방침을 통고했다. 하지만 명동성당 측은 “당신들이 명동성당에서 이렇게 최루탄을 쏘는 것은 예수께 총부리를 대는 것이다. 만일 계속해서 최루탄을 쏜다면 전두환 정권이 카톨릭교회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찰에 강력히 경고했다. 경찰이 물러났다 두려움은 연대를 통해 극복되었다. 서울의 여러 대학은 출정식을 가지고 시내로 진출해서 성당시위대에 호응했다. 명동성당의 성직자들도 직선제 개헌을 위해 단식투쟁과 철야농성 그리고 시위대의 ‘안전 귀가’를 위해 날마다 미사를 드렸다. 상계동 철거민들은 매일 솥이란 솥은 다 걸어놓고 라면을 끓이고, 빨래도 해주고, 잠자리도 제공했다. 특히 명동성당과 담장을 마주한 계성여고생들은 “언니 오빠들이 하시는 일이 훌륭한 일이라는 것을 저희는 압니다. 힘내세요. 저희들은 언니 오빠를 사랑합니다.”라는 쪽지와 함께 도시락을 농성장에 보냈다. 
 
류시현, <87년, 뜨거운 여름>,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30-232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3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