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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자기 최면 – 4.13 호헌조치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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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 열리기로 한 국민추도대회는 원천 봉쇄되었다. 전날부터 주요 정치계 인사들은 가택 연금되었으며, 검문과 검색은 물론 전국적으로 105개 대학이 심야 수색을 당했다. 당일 명동은 경찰에 의해 에워 쌓였고, 명동 부근 지하철 역 5개소와 버스정류장이 폐쇄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시위와는 다른 변화가 생겨났다. 시민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 쏘지 말라고 고함치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시위자를 격려하고, 그가 연행되면 경찰에게 달려들어 빼내기도 했다.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며 호응했다. 이러한 시민의 참여는 박종철의 고향 부산을 비롯하여 광주‧대구‧인천‧수원‧춘천‧전주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3월 3일 대행진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분노는 사태의 부당함을 밝히는 용기로, 용기는 민주화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6월 항쟁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5공 정권은 민심을 잘못 읽었다. 구속된 유성환 의원에게 1987년 4월 13일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의 유죄 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5공 정권은 2월과 3월의 민주화운동을 대규모 경찰 병력으로 봉쇄했으며, 대학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4‧13 호헌조치를 내세웠다. 전두환은 88올림픽이 끝날 때가지 개헌 논의를 일체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특별담화를 통해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조치는 전두환이 자신의 후임을 직접 지명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7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전국적 투쟁의 뇌관을 건드렸다. 각계의 시국성명과 농성 시위가 들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그런 가운데 통일민주당이 5월 1일 창당되어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해서 개헌투쟁에 나섰다. 5공 권력의 ‘자신감’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행동하는 시민의 등장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결과였다.  
 
류시현, <87년, 뜨거운 여름>,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23-224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2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