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5공의 반격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1986년 2월부터 시작된 야당의 직선제 개헌 운동에 관해 선진적인 시민과 학생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같은 해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의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 과정에서, 정치권의 의도와 달리 재야단체와 운동권 학생단체가 생존과 투쟁방안에 관한 다양한 주장을 분출했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관한 사회 각층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합일점을 찾기 어려웠다. 5공 정부는 인천사태를 “좌경 용공세력의 반정부 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같은 해 10월 국회에서 한 의원이 통일을 강조했던 발언은 이른바 ‘국시(國是)논쟁’을 일으켰다. 야당의원인 유성환이 1986년 10월 14일 정기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서울 올림픽에 동구 공산권 국가가 참여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5공 정권은 여당 단독의 체포동의안을 통과시켜 “반국가 단체 찬양고무”라는 국가보안법의 조항을 그에게 적용했다. 그 결과 그는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270일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정권은 국회의원의 국회 발언조차 문제 삼고 이를 정권 유지에 활용한 것이다. 같은 달 28일 건국대에서 열린 전국 20여 개 대학생 2천여 명이 모인 집회를 경찰은 강경 진압해서 1천 5백 25명을 연행하고 그들 학생 가운데 1천 2백 90명을 구속했다. 이른바 ‘건대 사태’로 불린 이 사건은 부끄럽게도 단일 사건 구속자로는 당시 세계 최고라는 기록을 남겼다. 5공 정권은 이를 “공산 혁명 분자의 폭력 난동”이라고 규정하고, 주동 학생 29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심지어 북한의 금강산댐이 건설되면 서울이 수몰될 수 있다는 공포심을 조성하고, 대응의 차원에서 평화의 댐 건설에 수 백 억의 돈을 모은 사건도 그해 말에 일어났다. 5공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1986년 직선제 개헌 운동도, 재야 민주화 운동도 현실적으로 성사되지 못했고, 학생들의 움직임도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시민들은 이러한 정치권과 학생들의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6월 항쟁에서는 어떻게 관성적인 체념을 벗어나 사회적 분노를 표출했던 것일까? 
 
류시현, <87년, 뜨거운 여름>,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18-219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1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