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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를 노래하라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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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철탑위에 오르는 사람이 보이는가/ 내 마음보다 더 높은 다짐들 저기 망루위에 서 있던 사람이 보이는가/ 내 눈물보다 더 뜨겁던 새벽을 철탑도, 타는 망루도, 지친 농부도, 취한 슬픔도/ 고르게 곧게 바르게 환하게 넓게 정의롭게 안녕 안녕 그대들 동지들/ 안녕 안녕 그대들 동지들 저기 들판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이는가/ 농부가 사는 저 시름의 마른 땅 저기 갯것가자 부르는 구럼비가 보이나/ 이름을 가진 그 전부의 대답들 철탑도, 타는 망루도, 지친 농부도, 취한 슬픔도/ 고르게 곧게 바르게 환하게 넓게 정의롭게 안녕 안녕 그대들 동지들/ 안녕 안녕 그대들 동지들 (윤영배, <위험한 세계>(2013) 가사 전문) 우리 사회는 겉보기에는 분노와 짜증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분노하라!’는 주문이 종종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울분을 가지고 곧잘 화를 낸다. 그것은 종종 위험한 수준의 우울증과 반사회적 충동으로 흐르기도 한다. 우리 일상에 가득 차있는 듯한 이러한 사적 차원의 짜증과 울분 그리고 화를 공적이고 사회적인 감성으로서의 분노와 적절히 구분할 수 있을까? 물론 양자 사이에 연결점들이 있기 때문에 사적 분노와 공적 분노를 두부모 자르듯 구별해내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음악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면서 이렇게 답할 수 있을 듯하다. 사회적이고 공적이며 정당한 분노는 반드시 음악과 함께, 노래를 통해 표출된다고 말이다. 노래와 음악은 일정한 사회적 차원의 공명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짜증에 불과한 내용을 담은 음악은 그러한 공명을 일으킬 수 없다. 음악은 신체라는 공통의 지반을 통해 사회적 공명을 이끄는데, 사사로운 짜증과 화는 듣는 이의 신체적 공명을 유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를 소재로 한 음악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역으로 말해 분노 감정의 음악적 재현이 적지 않은 사회적 의미를 띠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주문은 ‘분노를 노래하라!’라는 주문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분노를 노래하기 위해서는 분노가 곱씹어져야 하며, 분노라는 감정에 무늬와 패턴을 부여해야 하며, 그 패턴으로 듣는 이들의 신체적 공명을 얻어내야 한다. 무엇보다 분노를 노래하기 위해서는 저 우상의 문화,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서기 위한 구조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스펙터클이 우리의 신체를 계속해서 새로운 권위주의에 순응하도록 길들여내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분노를 노래할 수 있을까? 비주류 정신의 최후의 일각까지 주류 정신과 주류적 시스템 안으로 흡수하는 자본의 가공할 만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전례 없이 다각화된 매체환경은 잠재된 형태로나마 시스템의 내파(內破)를 위한 대안적 음악하기의 가능성을 심어놓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물론 화석화된 민중가요의 불같은 선동의 몸짓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분노와 저항은 다름 아니라 저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서 일상의 친밀한 만남을 회복하는 일, 마비와 불감증을 극복하고 잃어버렸던 신체적 공명을 되찾는 일을 의미한다.  
 
최유준,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09-211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09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