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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노예라 불리우길 거부합니다”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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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분노할 수 없는 현실’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상징적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1년 문화방송의 <시사매거진 2580>에서 가수와 소속사 사이의 불평등한 계약관행에 대한 보도가 나갔을 때였는데, 당시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산하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은 이에 대응해 일사불란한 단체행동을 보였다. 이들은 “우리는 노예라 불리우길 거부합니다”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갖고 ‘MBC TV 출연 거부 운동에 동참한다’고 단호하게 선언한 것이다. 과거의 상황에서라면 가수들의 단체행동과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소속사 관계자들을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소속사와 뜻을 같이 한 채 불공정 계약 관행을 고발한 MBC 기자들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가수들이 기획사의 의도에 따라 철저히 동원되고 조종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 상징적 사건이 구축하고 있었던 새로운 현실, 곧 ‘분노할 수 없는 현실’을 간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당시 기자회견문 가운데 일부다. 제작자와 연예 매니저는 저희를 캐스팅하여 당당한 스타급 연예인으로 성공시키기까지 자신의 믿음과 저희들을 믿는 마음, 이 두 가지 요소로만 길게는 몇 년에서 짧게는 수개월에 걸친 기획과 투자를 통해서 연예계에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 성공 여부는 어느 누구도 보장하지 않는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와 희망에 대한 투자와 노력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회견문 문장에서 비문법적으로 쓰인 주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가령 첫 번째 문장에서 주어는 ‘제작자와 연예 매니저(소속사)’일까 ‘저희’(소속 가수)일까? 부주의하게 쓴 문장을 트집 잡아 이들의 기자회견을 조롱하려는 뜻이 아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실언(失言)이 갖는 의미처럼 위의 비문(非文)은 글쓴이의 무의식적 구조를 드러내주는 듯하다. 말하자면 이 회견문에서 가수의 자아는 억압당한 채 매니저와 기획자에 종속된다. 이러한 무의식적 구조에서 가수와 매니저 사이의 대립적 관계는 무화되고 분노의 감정은 거세되는 것이다.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와 희망”에 대한 (가수의) 노력과 (기획사의) 투자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이날 단체행동에 나선 가수들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온몸으로 표상하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결과 <시사매거진 2580>이 보도한 불공정한 계약관행은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지만, 이미 사실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소속사와 맺는 착취적 관계는 소속사의 관점을 스스로 내면화한 가수들의 시각에는 포착될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할 수 없는 현실”이란 이렇듯 자기 경영의 논리를 통해 외적인 착취의 구조를 스스로 내면화하게 함으로써 개인들의 분노감정을 거세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형성 기제를 뜻한다. 
 
최유준,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02-204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02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