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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멸의 90년대”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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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대표되는 ‘민중가요’가 표출하고 실천해낸 분노와 사회비판은 노랫말이나 음악양식 자체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노래의 연행 과정에서 참여자들이 외부세계와 맞서 형성해낸 모종의 적대적 관계들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들은 한 마디로 ‘불온함’으로 수식될 만한 것이었다. 사실상 ‘민중’이라는 개념이 실제 역사 속에서 발휘한 힘은 ‘역사적 주체’라는 개념적 함의와 그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과 신념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운동의 주체들이 외부세계와 부딪치면서 실천적이고 감성적인 층위에서 관계론적으로 형성시켰던 ‘불온함’이야말로 그 핵심적 동력이었다. 이진경의 지적대로 “불온함이라는 감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서 온다”. 그것은 “기대한 행동이나 반응에서 벗어나는 이탈로 인해, 당연히 예상했던 궤적의 어떤 교란에서 발생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의 민중가요가 ‘비합법(불법) 테이프’와 같은 대안적 매체와 구술적 연행을 통해 실천해 보인 것은 바로 이러한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었다. 1992년 김영삼 문민정권의 등장에 이어 1997년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민중가요는 이러한 불온함을 잃기 시작했다. 민중가요는 권력자의 편에서 보나 일반 대중들의 시선에서 보나 더 이상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민중가요계의 비합법 음반 제작 관행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 이어졌지만, 1989년에 이미 합법적으로 출시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2집 음반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민중가요는 차츰 대중가요의 일부로서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역설적이지만, 정태춘의 불온한 노력이 성공시킨 1996년 음반사전심의 제도 철폐라는 사건은 민중가요의 불온함에 대한 시효를 종식시키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1992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표방한 ‘군사정권 종식’과 민주화 세력을 향한 화해의 제스처에 대해서 대중들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90%의 지지율로 환영했고, 정권이 선전하는 ‘세계화’와 ‘열린사회’의 기치에 순응해 갔다. 여기서 ‘세계화’와 ‘열린사회’란 정확히 5년 뒤 맞게 될 IMF 구제금융 사태를 예견하는바 국경 없는 자유무역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자본주의의 승리는 자명해진 상황이었다. 1990년대의 대중들은 냉정한 현실 인식 아래 제 갈 길을 모색해야 했고, 서서히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과 같은 자기계발서를 손에 든 채 신자유주의적 게임의 법칙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외부 세계와의 투쟁’이 1990년대 이후의 대중들에게는 곧 ‘자신과의 투쟁’으로 전환되었고, 불온함은 이제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관리하고 감독하여 순화시켜야 할 무엇이 되었다. 박세리의 골프샷을 배경으로 한 <상록수>의 노랫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지던 1998년에 발표한 음반 ≪정동진/건너간다≫에서 정태춘은 이러한 자기규율적 주체가 형성되는 풍경을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상록수>가 새롭게 묘사하는 장밋빛 현실 대신 애써 ‘잿빛’ 현실을 드러내 보이지만 그도 더 이상 분노를 터뜨리지 못한다. 노래 속 화자가 포착한 IMF 이후 한국인들의 일상, “아무도 서로 쳐다보지 않”는 그들과 함께 “지루하게 불안하게”,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갈 뿐이다. 1. 강물 위로 노을만/ 잿빛 연무 너머로 번지고/ 노을 속으로 시내버스가 그 긴긴 다리 위/ 아, 흐르지 않는 강을 건너/ 아, 지루하게 불안하게/ 여인들과 노인과 말 없는 사내들/ 그들을 모두 태우고 건넌다 2. 아무도 서로 쳐다보지 않고,/ 그저 창 밖만 바라볼 뿐/ 흔들리는 대로 눈 감고/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깊은 잠에 빠진 제복의 아이들/ 그들도 태우고 건넌다 (정태춘, <건너간다> 가사 일부) 
 
최유준,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98-200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9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