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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의(祭儀)의 형식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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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과 4·3, 이것은 사실 재현이 불가능한 사건들이다. 그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고통과 아픔을 겪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언어와 이미지는 이러한 사건들 앞에서 힘을 잃는다. 어떠한 언어와 이미지로도 그 사건 자체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 5·18과 4·3을 재현하는 작품들은 결국 이 불가능성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제주 4·3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회피했다는 <지슬>의 오멸 감독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한 듯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4·3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가 바로 ‘제의(祭儀)’라는 <지슬>의 영화적 형식이다. 제사라는 의식은 죽은 자와 삶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넋을 기리고 ‘기억’하는 행위이다. 인연과 기억, 오멸 감독이 제사라는 형식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인 4·3과 제주 사람들의 죽음을,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관계되는 것으로 다시 기억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지슬>은 “4·3에 대한 제사”이며, 이 영화를 통해 “관객도 제사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잊혀졌던 4·3을 ‘신위(神位)-신묘(神廟)-음복(飮福)-소지(燒紙)’라는 제사의 형식으로 재현하면서, 지금, 우리의 문제로 다시 기억하기를 요구한다. <지슬>의 처음과 마지막 시퀀스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군인 한 사람이 연기가 자욱한 집안을 돌아다니다 문을 열고, 이때 쏟아지는 햇빛에 의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제기(祭器)와 방문 앞에 붙어있는 지방(紙榜)이 화면에 들어온다. 아마도 제사를 지내려다 군인들의 습격을 받았을 한 집안의 모습을 영화의 처음 부분에 배치하면서, <지슬>은 제사가 중단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화가 제주의 자연을 포착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제주의 죽은 자들을 위한 제사가 중단되었다는 것, 그래서 제주의 자연은 아직 위로받지 못한 죽은 이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다. <지슬>은 제주의 하늘과 바다, 산과 나무, 그리고 무엇보다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과 사람들이 숨어있던 ‘큰넓궤’ 동굴을 영화에 담아내고자 하는데, 그것은 제주의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지 않았어야 할 죽음들이 그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하나의 장면이 있다. 순덕이 군인들에게 잡혀 처참히 유린당하고 결국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만철이 목격한다. 순덕을 좋아했던 만철은 차마 그녀의 죽음을 옆에 있던 상표에게 말하지 못한 채 산을 뛰어 올라가는데, 이때 산이 죽은 순덕의 몸으로 오버랩 된다. 알려지지 못한 순덕의 죽음이 제주의 산에 깃드는 듯한 이 장면은 오멸 감독이 제주의 자연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올레길 개발로 관광객이 물밀 듯이 몰려들던 무렵에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를 떠났다고 고백했는데, 여기에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이 관광의 대상으로 완전히 포획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의식이 자리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검은 화면을 배경으로 총소리가 이어지다가 점차 화면이 밝아지며,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동굴을 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곧이어 동굴 입구에 죽어 있는 무동의 아내와 아마도 그 공간에서 태어났을 무동의 아이가 화면에 들어온다. 이렇게 감독은 총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병치시켜 죽음의 공간이었던 ‘큰넓궤’ 동굴을 탄생의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그 동안 벌어졌던 죽음의 자리에 지방을 붙이고 그것을 태우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소지’라는 행위가 의미하듯이 지방을 태워 올리는 제사의 마지막 의식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그 모든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여 하늘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이어도사나’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시점에 이르러, ‘지슬’이라는 타이틀이 왜 제주의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지, 그것도 산과 구름으로 경계가 나뉜 하늘이었는지가 드러난다. <지슬>은 중단된 제사를 이어받아, 기억되지 못한 채 제주 곳곳에 묻혀있던 죽은 자들의 넋을 하늘로 올리려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제사이기 때문이다.  
 
강소희.주선희, <영화는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는가?>,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78-181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7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