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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극의 한계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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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수백 명의 무고한 죽음 앞에 아무런 해명도 없이 ‘폭도들의 반란’이었다고 천연덕스레 말하는 ‘그’를 단죄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에 지나치게 몰두함으로써 영화적 상상력을 제약한다. 그것은 인물들이 과거의 상처가 복수로써 치유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과 사건이 다만 한 인물의 잘못된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단편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데서 드러난다. 예컨대 복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혁을 제외한 인물들은 아무런 갈등도 보이지 않는다. 복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도 인물들은 한 치의 의심 없이 적을 타도하는 데 몰입한다. 그로부터 피해자들의 분노는 합리성을 잃어버린 감정의 폭발로까지 보이고, 그들의 상처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 그 누구의 책임이라는 편협함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사건의 피해자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가해자는 너무나 잘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라고 요구하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로 생생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분노의 대상이 나도, 사회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전적으로 전두환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진배의 대사, “언능 쏴! 26년이여 26년! 지금을 놓치면 앞으로 우리가 멀헐 수 있겄냐?”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역사의 비극은 그 누군가의 만행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조건과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600만의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히틀러라는 한 인물의 잘못된 소행일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그 사건에 가담한 적이 없는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역사를 반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어느 한 인물의 ‘광기’로 치부되었다면, 어느 한 민족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여겨졌다면, 아우슈비츠 이후 서양의 지식전선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서양의 지식인들은 인간에 대한,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보고서를 쓰지 않았던가? 2,500여 년에 걸쳐 세워왔던 거대하고도 확고한 인간이성의 성탑을 스스로 폐기해버리고 본질이 아닌 실존을 다시 사유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철저한 반성은 결코 쉽고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반성은 역사를 스스로에 책무지우는 용기와 나의 묵인이 역사의 반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자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영화에서 광주 시민은 여러 번 ‘빨갱이’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인물을 통해서든,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더욱이 영화는 사건이 어떠한 맥락 속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결정에 의해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삭제하고 있다.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의 적을 향한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랄지언정 영화 밖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반성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관객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반성을 요구하면서 안전하게 뒤로 물러선다. 영화는 5‧18의 아픔이나 고통의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의 대상에게 부여함으로써 5‧18과 관객들을 연결하는 지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강소희.주선희, <영화는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는가?>,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76-178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7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