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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축옥사>에 나타난 분노의 한 장면 1

노(怒)
부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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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록(李成祿)의【승문원 판교이다】 원정을 받았다. 공초에 이르기를 “신과 김제남은 범범하게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웃집에 살면서 그가 한 짓을 보니, 옳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 어떤 사람과 집을 바꾸자고 약조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친구나 친척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사촌 매부 이이첨은 사람됨이 효성과 우애가 있고 강개하여 악을 미워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에게 김제남이 좋지 못한 짓을 하더라고 말했더니, 이이첨 역시 신에게 궁중에 저주한 일을 말해 주면서 신보고 속히 거처를 옮기라고 권하였기 때문에 신이 그 즉시 남대문 밖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김응벽의 경우는 전혀 그의 이름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필시 신이 무장 현령(茂長縣令)으로 있을 때에 그가 방납의 일로 주위를 왕래하다가 신의 성명을 들었을 것이고, 또 신이 이 무리들을 극력 쫓아냈기 때문에 그가 미워하다가 이렇게 끌어들인 것일 겁니다. 신이 사전에 피하지 못하였으니, 신하로서의 도리만 훼손시킨 것이 아니라 이이첨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하였다.  
이성록의 공초는 역모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화를 내는 주체는 광해군과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대북파’라 할 수 있다. 권력은 획득하였지만 사림의 여론을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었던 정인홍,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와 왕권강화를 추구하였던 광해군은 그 반대세력에 화를 표출하였던 것이다.
왕과 대북파의 화풀이 형태는 이상의 이성록 공초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건과 연관된 다른 서인, 남인 신하 등의 사례는 형을 받거나 쫓겨나거나 또는 부관참시(이미 땅에 묻힌 시체를 파내어 토막내는 것)되었다. 즉 왕은 역모사건과 관련된 자들을 역모죄에 해당하는 형법을 집행하여 화를 풀어버리는 형태를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시대(전근대)’ 화는 한 개인(사적차원)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개인적인 일로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公)’으로서 지위를 부여받았던 왕 곧 국가적 차원, 공적차원에서 이뤄지는 화는 정국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광해 67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6월 19일(병오)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 -광해군 다시 읽기-] {역사비평} 통권 44호 가을,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