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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후 명일 강화협상에서 나타나는 선조의 분개

노(怒)
부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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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본디 의기(義氣)가 부족하여 경략(經略) 앞에서는 아첨을 일삼았고 유경의 화친 요구에도 안으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나의 품성(稟性)은 회호(回互)하지 못하여 영유(永柔)에 있을 때부터 그 잘못을 힘껏 말했지만 불가능해서 항상 분개함을 품었다. 지금도 유경의 일에 있어서 또한 염려가 없지 않으니, 사람이 죽을지언정 어찌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선조가)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본디 의기(義氣)가 부족하여 경략(經略) 앞에서는 아첨을 일삼았고 유경의 화친 요구에도 안으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나의 품성(稟性)은 회호(回互)하지 못하여 영유(永柔)에 있을 때부터 그 잘못을 힘껏 말했지만 불가능해서 항상 분개함을 품었다. 지금도 유경의 일에 있어서 또한 염려가 없지 않으니, 사람이 죽을지언정 어찌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이 같을 따름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은 조선에 원병으로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후 명․일 사이의 강화 협상을 위해 심유경을 보냈다. 심유경은 일본군과 강화협상을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명은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 이후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되었고 민심 또한 동요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과 강화협상을 맺고자 하였다. 하지만 명 조정 내에서도 일본과의 강화에 반대하는 신료들의 공세가 심하게 제기되었다. 이에 조속한 강화를 위해 조정에서는 경략 송응창의 뒤를 이어 1593년 12월 顧養謙을 파견하였는데 그는 강화론자로서 선조에게 일본과의 강화를 강요하였다. 경략에게 아첨하고 심유경의 화친 요구에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我國(의 여러 신하들에게서)에 나타났는데, 이에 그 잘못을 선조가 말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분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즉, 경략, 심유경의 명일강화론과 이에 아첨하는 조선의 신하들에 대해서 선조는 분개하였다.
선조는 이와 같이 자신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면서도 다시 자신의 분을 삭이고 있다. 즉, “그러나 이 또한 한 가지 방도로서 나의 소견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니 아뢴 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한걸음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강력한 의지는 한가지 방도로 자신의 소견으로 미칠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결과 승문원이 회계한 것과 같이 자문에는 사실대로 급한 것만 고하고 그다지 분명치 않은 말은 넣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1) 그러나 이 또한 한 가지 방도로서 나의 소견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니 아뢴 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2) 승문원 도제조(承文院都提調)가【유성룡】 자문(咨文) 가운데에 땅을 떼준다든가 결혼을 요구한다든가 하는 말을 제거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심유경이 왜노(倭奴)와 몰래 약속한 말을 어찌 북경(北京)에 가서 발언할 리가 있겠는가. 사람마다 각각 의견이 있을 텐데 나의 뜻은 이미 다 말하였다. 다만 결혼 요구는 화친(和親)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다시 의논해도 꺼리지 않겠다.”하였다.
승문원이 회계(回啓)하기를, “경략(經略) 등 여러 사람이 서로 결탁하고 사실을 가리면서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의 흠을 찾으려 하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적정(賊情)을 호소하면서는 다만 사실대로 급한 것만 고하고 그다지 분명치 않은 말은 넣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하였다.
명 황제에게 직접 조선 사정과 ‘강화의 부당성’을 알리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강화논의가 대두된 이후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의 진격과 결전을 방해했고, 조선은 독자적인 군사 작전권을 상실하여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강화론을 수용하고, 명군에 대한 지공에 성의를 다하라는 명군 지휘부의 강요와 횡포 앞에서 선조나 신료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고, 주권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14일(계해) 
한명기, [임진왜란기 명·일 협상에 관한 연구 -명의 강화 집착과 조선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98,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