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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저항, 사유하기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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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분노의 한 형태로 나타나는 반항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반항은 인간에게 자연적이고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인 토대이기도 하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카뮈는 데카르트가 제안했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재해석한다. 사유의 차원에서 분노는 ‘코기토’와 같은 역할을 하고, 그러한 점에서 ‘반항한다’는 것, 곧 부조리함에 분노하여 저항하는 일련의 과정이 ‘존재’의 전제조건이라고 본다. 카뮈가 ‘반항’을 인간존재의 전제로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저항으로서의 반항을 문제 삼았을까? 그는 자신의 동시대에 통용되었던 ‘정당화’의 양상에 물음표를 던진다. 무수한 살상과 전쟁, 대량 학살이 횡행하던 시대에, 범죄가 무죄로 옹호되는 시대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시대에 대한 물음과 탐구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응당 행해야 할 직무이다. 그러나 카뮈가 자신의 시대에 던진 물음처럼, 오늘의 현실에서 현재를 직시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삶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은 과연 정당한가를 묻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일개 평범한 아이히만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홀로코스트’의 전범이 되었는지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형식으로 보여준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죄악의 실상을 충격적으로 전달한다. 상명하복의 조직체계에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조직의 논리는 개인의 합리적 판단을 배제하는 폭압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양심을 힘으로 절단하는 폭력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나약하다. 관료체계의 명령에 따른다는 심리적 위안은 조직과 단체, 혹은 국가의 범죄까지도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행하게 될 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된다. 불의에 타협함으로써, 상황의 논리 속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인간은 공범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차츰 일말의 죄의식조차 없이, 정서적 동요 없이 범죄와 살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 특정한 조직이나 집단의 정체를 위해 복무하면서 저지르게 되는 죄악은 한 인간을 맹목적 충성과 복종의 괴물로 만든다. 부당함에 대한,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과 분노가 없을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 그러한 ‘괴물’을 배양한 숙주는 아무런 윤리적 반성이 없다. 시스템이 그러하다고 변명한다. 그렇기에 분노와 저항에 대해서 우리는 숙고하고 사유해야 한다. 생존의 빛과 가치의 이상은 분노와 저항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바다 위를 멋지게 나는 갈매기 조나단의 비상을 보며 자유로움을 시각화한다. 갈매기에게 조차 자유로운 비상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저항하는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시인 이성복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새들의 비상은 오직 공기의 저항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 너무도 당연한 것은 쉽게 잊혀진다. 삶이 그렇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익숙하기에 쉽게 망각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면서도 잊는다. 그래서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저항과 분노를 상실할 때, 핍진하게 사유하지 않을 때, 우리는 권력과 힘의 자동인형으로 전락한다. 너와 나, 우리는 누구나 아이히만과 같은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김경호, <분노한다 고로 살아간다>,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76-278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7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