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화는 1904년 2월 황흥·송교인 등과 함께 장사에서 화흥회를 결성하고 혁명에 참가하여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봉기를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5년 6월 송교인과 함께 도쿄에서 잡지 {이십세기지지나(二十世紀之支那)}를 창간했으며, 중국동맹회의 조직·건립과 회칙의 기초 작업에 참가하여 [혁명방략(革命方略)]의 초안을 작성하고 국외에서 혁명운동에 종사하였다. 중국이 사실상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하자, 진천화는 국가의 운명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고 슬퍼하면서 혁명운동에 매진하였다. 진천화의 행동은 큰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해외 유학생들을 자극하여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1906년 일본 문부성이 재일유학생의 활동을 단속하겠다는 내용의 ‘취체청국유일학생규칙(取締淸國留日學生規則)’에 항의하기 위해 대삼(大森) 해안에서 투신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