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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손으로서의 의무를 회피하는 아들

노(怒)
부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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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노옴, 왜 말을 못하느냐?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말을 해라.”
드디어 이기채가 상체를 곧추세웠다.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이 철딱서니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하에 쓰잘 데 없는 놈 같으니라고. 네 이놈, 네가 대체 중정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집구석이 멸문하여 성이 없어지고 문짝에 대못을 치게 생긴 이 마당에, 기껏 네가 하는 일이, 소위 종가의 종손이라는 놈이, 애비는 피가 바트고 뼈가 마르는 마당에 떠억 버티고 앉아서 허는 말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음악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가야겄습니다? 허허, 집구석이 망헐라면 대들보가 먼저 내려앉는다더니, 일본놈 창씨개명 나무랄 거 하나도 없구나아, 하나도 없어. 아니 내 집구석에서 내 자식놈이 먼저 망허느라고, 제가 자청해서 풍각쟁이가 되겠다니, 성씨가 있으면 무얼 허며 가문이 있으면 무얼 헐 것이냐? 아이구, 아주 너한테는 잘되어 버렸구나, 으응? 잘되어 버렸어. 너 같은 놈한테 물려주자고 할머님이 한평생을 그렇게 노심초사 허시고,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믿고,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이기채의 말이 뚝 끊어진다.
 
음악공부를 하러 동경으로 가겠다는 강모의 말에 아버지 이기채가 벼락같이 화를 내는 부분이다. 이기채는 장손으로서 강모가 제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나 강모는 그런 의무와 책임에서 회피하려고 한다. 부자간의 갈등이 증폭되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명희, {혼불} 1권, 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