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섭귀는 宇文鮮卑에 원한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모용섭귀의 원한을 풀려고 조정에 표를 올려 우문선비를 치기를 청했다. 진무제 사마염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모용외가 분노하여 遼西를 침범해 많이 죽이고 약탈하였다. 황제가 유주의 제군을 보내 모용외를 패퇴시켰다. 모용외가 다시 창려를 노략질하여 매년 그치지 않았다. 또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부여를 치니 부여왕 의려가 자살하였고, 모용외가 그 국성을 평정하고 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몰아서 돌아왔다. 이후로도 昌黎를 다시 노략질하여 매년 그치지 않았다.
{자치통감}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2002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