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이 예전에 함경도의 중심지인 영흥(永興)과 안변(安邊) 등지에 세워져 있었으니, 이는 본도가 영안도(永安道)로 일컬어지던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시대 상황이 급변하면서 병화(兵火)를 두 번이나 당하는 바람에 중간에 없어지는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사자(士子)들이 문헌(文獻)의 고장임을 입증할 길이 없어진 것을 통분스럽게 여긴 나머지, 서로 꾀하지 않고도 같은 마음이 되어 자재를 모으고 힘을 합쳐 함흥(咸興) 문회당(文會堂) 동쪽에 중건을 하고는, 그동안 소홀해졌던 의례(儀禮)를 행할 방도를 더욱 강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서로 힘을 합쳐 함흥 문회당 동쪽에 중건하여 의례를 행할 방도를 구했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