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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점사와 53불

노(怒)
긍정적 감성
구비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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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점사가 생기기 전 그 옛날에 인도에서 조성한 53불이 월씨국에서 쇠종을 타고 바다를 건너 해금강 안창현의 포구에 있는 괘종암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불법의 도량인 금강산의 산록이었으므로 이내 괘종암을 떠났다. 한편, 그 고을의 군수인 노춘은 53불이 안창현에 도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휘하를 거느리고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왔다. 그러나 부처들은 간 곳이 없고 모든 나뭇가지가 다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군수는 이는 필시 부처가 간 곳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기고 서쪽의 외금강으로 향하였다.
53불은 포구로 올라 금강산으로 가던 중 지금의 경고(京庫)에서 잠시 쉬면서 소요하였다. 그래서 그곳을 소방(消房)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소방에서 금강으로 가는 다음 지점인 문수촌을 거쳐 갔다. 문수촌이라는 지명은 노춘 일행이 53불의 행로를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한 비구니가 오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방향을 가리켜 주었다. 그 비구니가 사실은 문수보살이었으므로 생긴 명칭이다.
노춘 일행은 부지런히 53불의 자취를 뒤따랐으나 영마루에 오르니 행방이 묘연하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저 아래 산허리에 한 비구니가 꿇어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일행이 그 곳으로 가까이 가보니 비구니가 아니라 절하는 형상의 바위였다. 그래서 이곳을 이유암(尼遊岩) 또는 이대(尼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행은 바위가 절하는 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다시 방향을 잃었다. 그때 흰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따라오라는 시늉을 지었다. 그곳을 개제 또는 구령(狗嶺)이라 부르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얼마큼 가는데 갑자기 개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노루가 나타난 길을 인도하였다. 그래서 그곳을 ‘노루목’이라 한다.
노루목을 지나 한참 가니 어디선가 쇠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일행은 종소리를 듣고 멀지 않은 곳에서 53불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서 그곳을 환희고개[歡喜嶺]라고 이름 지었다. 일행은 종소리를 따라 동구에 이르니 거기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옆에는 엄청나게 큰 느릅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53불이 타고 온 쇠종은 그 느릅나무에 걸려 있고, 53불은 나뭇가지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유점사의 ‘유(楡)’자는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노춘은 53불에 공경 예배하고 돌아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듣고 노춘에게 이르되, “느릅나무가 있는 곳에서 부처들이 정좌한 것은 그곳을 거주터로 여김이니 그곳에 절을 크게 지어 53불을 모시고, 절 이름을 유점사로 하라.”고 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노춘이 책임자가 되어 유점사를 세우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절을 지우려면 지형으로 보아 연못을 메워야 하는데 그 연못에는 9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절을 창건하려면 용을 쫓아내야 하는데 그러다가 어떤 화를 당할지 몰라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노춘은 할 수 없이 부처의 힘을 빌기로 하였다.

“부처님들께서 먼 바다를 건너 이곳에 주석하시기 위해 오셨으므로 저희가 큰 절을 지어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연못을 메워야 하는데, 여기에는 용 아홉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절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사람의 힘으로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으니 부처님의 신통력을 용을 내보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53불을 이 간청을 옳게 듣고 용을 내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부처들도 막상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불가에서 제일로 금하는 살생을 빚을 수도 있으므로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먼저 연못으로 가 용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리를 양보하도록 설득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여기에 정주하기 위해 바다 건너 멀리서 왔으니 우리의 사정을 보아 이 터를 양보하면 금강산 신에게 부탁하여 좋은 자리를 물색하여 드리겠소. 그러면 우리도 좋고 그대들도 좋을 터이니 어떠하오?”
그러자 용들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마시오. 이곳은 조상 대대로 살아 온 우리의 고향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으니 그리 알고 물러가시오.”하면서 완강히 거부하였다.
부처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중지를 모았으니 그것은 연못의 물을 서서히 덥히자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불 화(火)자를 써 못에 던지니 이윽고 연못의 물이 점차 더워지다가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용들은 참고 참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연못을 박차고 나와 꿩으로 변신하였다. 그러자 부처들은 매로 변하여 꿩을 쫓았다. 꿩이 다시 매로 변하니 이번에는 매가 독수리로 변하여 쫓았다. 그러나 매는 용으로 변하여 구룡폭포가 떨어지는 구룡연(九龍淵)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구룡폭포와 구룡연은 이 일로 인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그래서 어려운 공사 끝에 잘이 서고, 스님들이 입주하였으며, 느릅나무 덩굴을 조각한 받침 위에 53불을 안치하고 법당에 정중히 모셨다.
한편, 자기 집을 빼앗긴 용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반드시 보복하리라 결심하고 떠나면서, “너희들이 남의 집을 메워 절을 짓고자 하나 절을 지어도 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부터 샘이라는 샘은 다 막아버리겠으니 어디 견디어 봐라.”고 선언하였다. 절이 완성되자 과연 샘물이 모두 말라버렸다. 용이 분풀이로 샘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의 스님들이 모두 나서서 샘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그렇게 되니 절이 폐사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스님들은 53불에게 샘을 달라고 간곡히 기도하였다. 그러자 부처의 계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새들을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스님들이 계시대로 새들을 잘 관찰하니 하루는 여러 무리가 한 곳에 모여 땅을 쪼고 있었다. 스님들이 보고 그곳을 파니 물이 펑펑 터져나왔다. 그래서 그 샘은 새들이 쪼아서 찾은 것이라고 하여 조탁정(鳥啄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폐사 직전의 유점사는 번창하여 금강산 사찰의 본산(本山)이 되었고, 사명당을 비롯하여 훌륭한 대덕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인도에서 건너온 53불을 안치하기 위해 승려들이 금강산 부근에 절터를 정하였으나 그곳 연못에 사는 용들과 갈등이 발생하게 되나 53불의 힘을 빌어 용들을 쫒아내고 그곳에 절(유점사)을 지었다. 터전을 잃은 용들은 분개하여 절의 샘물을 고갈시켜 보복하였다. 그러자 승려들은 53불의 힘을 빌어 샘물을 얻게 되었고 유점사는 번창하게 되었다. 즉, 이 이야기는 불교의 정착 과정에서 발생한 토착문화와의 갈등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불교가 토착문화의 저항을 극복하고 정착한다는 점에서 불법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김의숙 편저, {우리 불교 설화}, 북스힐, 2003년. 
김의숙, {그리운 금강산 이야기}, 북스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