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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상처를 다독이는 그림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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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현실주의 수묵화의 주된 소재는 80년 5월 광주의 아픈 역사와 이를 겪어낸 민중의 슬픈 현실이었다. 이후 이어진 박승희 열사와 김남주 시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픈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모습도 담고 있다. 김경주, <들불 Ⅰ>, 1990년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를 살아온 대다수 광주의 작가들에게 가장 큰 강박관념은 5월 광주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으로 인해 과잉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주제의 무게에 눌려 끌려가기도 하였다. 대작 <대동세상>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던 김경주에게도 80년 5월은 늘 원죄로 남아있었다. 그중 <들불 Ⅰ>은 5월 사진집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다.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는 듯한 사내의 형상을 판화를 찍듯 정면에 그리고 자욱한 최루가스 뒤로 무수한 횃불을 그려 넣었다. 방독면을 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사내는 당시 투쟁에 참여한 익명의 다수를 상징하고 있다. 작가는 이 그림에 쓰기를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나는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는가?” 라며 “남들처럼 당당하지도 떳떳하지도 못했던 10년이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아 울컥울컥 목이 매여 오던 시절 방독면 쓴 사내의 모습은 내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고 고백하였다.(김경주, <<화창한 날의 상처>>) 80년 그날에서 10여 년이 지나 그린 이 그림은 그 동안 작가가 가슴 한 구석에 담고 있던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문종, <사산>, 1988년 김경주의 작품들이 수묵을 원숙하게 사용하여 작가의 섬세한 감성을 담아내었다면 박문종의 작품은 일찍이 투박하면서도 거친 필치로 광주 사람들의 슬픔, 분노, 변혁에의 열기를 직접적으로 화폭에 담았다. 박문종의 <두엄자리>, <사산> 연작시리즈와 <그리움> 등은 수묵화를 통해 현실과 역사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중 <사산>은 오월 그날의 참상을 애통해 하는 주름진 어머니의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들을 내려다보는 상단의 노송에 걸려있는 검은 해, 그 좌우에 있는 호랑이와 학 등은 다분히 민화적 단순성을 차용한 것으로 바탕의 붉은 색과 더해져 핏빛 과거의 포악성을 고발하고 있다. 같은 시기 허달용은 <광주의 혼>에서 5‧18광주민중항쟁 때 희생된 주검들을 강렬한 흑백대비와 함께 붉은 핏줄기를 더해 주제의식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언론에도 허달용, <광주의 혼>, 1989년 공개된 바 있었던 1980년 5월에 산화한 무명 열사들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네 인물의 얼굴은 처참했던 당시 현장을 상기시킨다. 주검의 흐트러진 머리칼은 수묵의 번짐 효과를 이용해 표현하였고 부패해가는 시신의 느낌 또한 먹과 누르스름한 안료의 번짐으로 살려내었다. 오월항쟁의 참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허달용, <산이 된 바보>, 2009년 5월과 이후의 역사적 사건을 담은 작품들은 매년 5‧18기념전과 여러 전시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 그 중에서 허달용은 각종 행사에 참여하며 거리현장의 현실들을 꾸준히 화폭에 담아냈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촛불시위에서부터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의 죽음까지 우리 사회의 굵직한 일들이 그의 섬세한 붓 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광주에서의 현실주의 수묵화는 대중을 이끄는 선동성이라는 면에서는 판화나 걸개그림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섬세하고 절제된 표현효과는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스스로 번지고 퍼지고 우러나와 울림이 있는 수묵의 액체성’은 80년대 후반의 사회상황에 더 걸 맞는 표현수단이었다. 한 단계 가라앉힌 감정의 절제가 있었기 때문에 강한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현재까지 이어지는 생명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선옥, <분노의 화폭>,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45-147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45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