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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물러가라!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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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생존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민족 자주권 침탈은 민중분노의 근간으로 표현되었다. 1919년 한일합방조약으로 36년간이나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던 일제에 대한 항거와 함께 미국에 대한 반감은 곳곳에 그려졌다. 제1폭인 갑오농민전쟁에서는 열강의 식민지 분할에 따른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카스라 테프트 밀약(1904)을 일장기와 성조기로 표현하였다. 이를 향해 농민군은 분노의 죽창을 겨누고 있다. ≪민족해방운동사≫ 중 <민족생존권투쟁> 부분, 1989년 반미감정은 전 폭에 걸쳐 드러나 있다. 제3폭 <항일무장투쟁>의 배경에서 조차 독립투사들의 씩씩한 전투모습 뒤로 파이프를 물고 철모를 쓴 미군이 성조기를 배경으로 서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일제시기부터 조선은 아시아의 새로운 시장으로서 유럽‧미국 자본주의의 상품처리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이승만 등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을 조종하여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넓혀가고 있었음을 포착한 것이다. 해방 이후 본격적인 미국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식량문제와 좌익척결 문제 등 각종 사건과 함께 급기야 1950년 6‧25 전쟁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반도를 놓고 벌이는 세계열강과 미국의 음모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의식은 제4폭 <해방-대구 10월> 이후에도 거의 모든 사건의 배후로 그려져 있다. 반미감정은 60‧70년대에는 극히 은폐되어 있어 크게 드러나지 않다가 1980년 광주학살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알려지면서 다시 터져 나왔다. 5월 항쟁 기간 중 광주에서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러 올 것이다”는 소문과 함께 “조금만 더 버티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근해에 미군 함정이 접근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라 정황을 살피고 신군부를 후원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1980년 신군부의 쿠테타와 학살을 미국이 감독하고 후원하였다는 사실에 시민들은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 격렬한 분노는 잇따른 미문화원 방화로 이어졌다. 이후 반미 자주화운동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기본출발이 되었다. 80년대 상황을 그린 제9폭 <민중생존권투쟁-6월항쟁>과 제10폭 <7‧8월 노동자대투쟁-조국통일촉진운동>에는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형상화되어 있고, 노동자, 농민, 학생이 어깨동무를 하고 성조기를 찢는 장면을 중앙에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반미 감정이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민족해방운동사≫는 1980년대 현장미술운동을 총체적으로 집약하여 공동창작을 시도함으로써 미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4월 13일 서울대 전시를 시작으로 몇 몇 대학을 거쳐, 5월에는 광주 금남로, 부산역광장 등에서 전시되었다. 대학 구내 뿐 아니라 가장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전시되었고, 이를 본 시민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그와 같은 대중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6월 29일 한양대 전시 중에 압수‧소각되었다. 몇 달에 걸쳐 수 백 명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 슬라이드는 약속대로 북한에 보내져 북녘미술인들에 의해 실물크기로 복원되었고 평양축전 기간(1989년 7월) 동안 원산, 함흥, 개성 등지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이는 역사상 처음 이루어진 남북한 미술교류였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각 미술패의 주필을 맡았던 홍성담‧정하수‧차일환‧백은일‧이태구‧안인기‧신동옥‧이효진 등 아홉 명이 체포 연행되었다. 그중 총 지휘를 맡았던 위원장 홍성담은 간첩죄가 덧씌워져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간의 실형을 살았고, 다른 작가들도 모진 고문과 함께 최소 몇 개월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 시대 최대 규모의 작품에 대한 최고의 탄압이었다.  
 
이선옥, <분노의 화폭>,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41-143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4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