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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열이를 살려내라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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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무렵에는 해당시기 학생운동이 요구하는 시각매체를 미술인들이 즉각 창작해 냄으로써 미술운동이 조직화되었고, 걸개그림의 기본 형식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특히 오윤과 홍성담의 목판화 형식을 비롯하여 판화운동의 성과를 이어받아 ‘굵은 선’을 사용하는 형식적 틀이 마련되었다. 광주시각매체연구소, <작살판>, 1986년 80년대 중반 걸개그림은 1984년 두렁의 <조선수난민중해원탱>이나 1986년 광주시각매체연구소의 <작살판> 등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그려졌다. 위 두 작품은 단청안료를 사용하여 전통회화의 여러 장점을 계승하면서 내용에 있어서는 5‧18항쟁이나, 근‧현대항일무장투쟁과 반미운동의 역사를 민중적‧투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후 걸개그림은 노동투쟁현장에 주로 사용되었다. 대형화면인 만큼 대부분 집단창작으로 이루어졌고, 미술인 뿐만 아니라 현장의 노동자가 함께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그림패 ‘활화산’이 거제도 조선소에서 현장의 산업노동자들과 함께 제작한 <노동해방만세도>(1987),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거리투쟁을 장엄하고 박진감있게 형상화한 <7‧8월 노동투쟁도>(1987), 미술인들이 멕스테크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장에 합류하여 집단 창작한 <멕스테크 민주노조>(1988)를 비롯하여 1988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법 개정을 촉구하는 서울 대회에 걸린 <노동자> 등 여러 투쟁현장마다 걸린 걸개그림은 그곳에 모인 노동자들의 뜻을 규합하고 사기를 북돋우는 기능을 하였다. 최병수 외 만화사랑,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년 80년대 집회현장에 걸개그림이 빠지지 않고 사용되었지만, 시민 대중의 가슴속에 뚜렷이 각인 되었던 것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통해서일 것이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1987년 6월 9일 경찰이 직격으로 쏜 SY44 최루탄에 뒤통수를 맞아 피흘리고 있는 연세대생 이한열을 선배인 김종원이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사진을 판화로 제작한 것을 다시 걸개그림으로 만든 것이다. 1987년 우리 사회에는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다. 1월 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고문을 받다 숨졌고, 4월 13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발표가 있은 후 ‘4‧13호헌조치 무효’, ‘직선제 관철’, ‘박종철군 사건 진상규명’ 등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연이은 시위 도중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며 시위는 날로 격렬해졌다. 시위대도 학생만이 아니라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까지 근무 중에 가담하면서 6월 29일 결국 5공화국은 ‘6‧29선언’으로 항복하였다.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군은 7월 5일 새벽 세상을 떠났고,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전후로 한 시기 걸개그림은 대중 집회현장에서 본격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열이를 살려내라>에 사용된 단색판화 형식은 이후 걸개그림의 입체적인 표현 방법으로 이어졌다. 이후 기존의 판화를 확대하여 걸개그림으로 그린 예도 적지 않다. 1987년 6월 전남대, 미술패 “불나비‘는 홍성담, 김경주 등의 수묵채색그림과 판화작품 <반고문전>, <대동세상>등을 걸개그림으로 재창작하였다. 1989년 조선대학교 교지 편집장이었던 이철규 열사의 사인규명 투쟁 속에서도 사진을 활용한 걸개그림의 이용이 두드러졌다. 
 
이선옥, <분노의 화폭>,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36-138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3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