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분노는 상속되어지는 유산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토록 소중한 생명을 던져가면서까지 분노하고 투쟁했을까? 이 문제는 죽음을 목도한 살아남은 이들의 살아 있다는 죄의식, 그리고 이에 수반하는 부채감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4‧19의 경험자 김주언은 “민주혁명 과정에 많은 선배 동료들이 총에 맞아 비명에 이 세상을 떠났건만, 자신은 40여 년을 더 살았으면서도 자신을 알아달라고 4‧19 회상기를 쓴다는 것을 매우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고백한다. 박해준은 “반독재 4‧19 정신을 위배한 군사정권이 주는 보상은 받을 수 없다”며 보상을 거부했다. 30여 년 간 고통을 참아오던 박씨는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서야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다(<<4‧19혁명사>>). 곧 살아있다는 죄의식과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었기에 4‧19 민주정신이 오래 기억되고 역사의 현장에서 소비 유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태일이 몸을 불사른 일은 오늘날 살아남거나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부채로 남아 있다.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이 말은 그의 죽음에 접한 모든 이들이 투쟁의 대열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말이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의 삶과 죽음의 기록에 접하고는 뭉클한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투쟁의 의지로 새롭게 다져지게 되는 것은 바로 전태일의 죽음의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