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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습작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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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헤어진 서연과 승민은 무려 15년만에 재회하게 된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연(한가인)은 제주도에 있는 고향집을 헐고 집을 새로 짓는 프로젝트를 맡기기 위해 건축가가 된 승민을 찾아온다. 자신을 첫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승민(엄태웅)에게 서연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 비문이 되어버린 “나 몰라.......세요?”라는 대사 속에는 옛 친구에 대한 반가움과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다니!’하는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배어 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위해 제주도 고향집을 멋지게 다시 지어주고 싶은 서연은 다시 만난 승민에게서 조금씩 예전의 설렘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승민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한 서연은 승민에게 선물하려던 넥타이를 병석에 누운 아버지에게 선물하면서 뒤늦은 설렘을 애써 억누르려 한다.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들켜버린 서연은 승민과 소주를 마시면서 서글픈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 “조개가 들어가면 조개탕이고 알이 들어가면 알탕인데 매운탕은 왜 그냥 매운탕일까. 나 지금 사는 게 꼭 매운탕 같아. 속에 뭐가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맵기만 하네.” 불확실한 미래에 비해 너무도 확실한 현재의 고통 속에서 서연은 길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괴로워하던 서연은 승민과 함께 집을 짓는 일에 집중하면서 점점 활기를 찾아가게 된다. 원래 서연은 집을 완전히 다시 지으려고 했지만, 유능한 건축가가 된 승민의 최첨단 디자인이 낯설기만 하다. 멋있고 세련되긴 하지만 ‘우리 집’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 낯선 집. 새집의 설계도를 보고 당황하는 서연을 위해 승민은 완전한 개축이 아닌 증축을 제안한다. 집의 본래 모습을 살리면서도 좀 더 살기 좋고 편안하면서 동시에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더 깊게 끌어안는 집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집을 ‘함께’ 지으면서 서연과 승민은 어린 시절 둘만의 약속을 떠올리게 된다. 나중에 꼭 이층집을 짓고 싶다던 어린 서연은 승민에게 공짜로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작품이 첫사랑 서연을 위한 집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승민. 그에게 첫사랑 서연의 등장은 잃어버린 옛사랑의 귀환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현재(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둔 상황)를 위협하는 강력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서연이 어린 시절 키를 재던 흙벽의 자국, 어린 서연이 실수로 발을 디딘 시멘트 자국, 그리고 그녀가 오래 전에 포기했던 피아노까지 새 집 안에 그대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과거의 서연’과 ‘현재의 서연’, 그리고 ‘미래의 서연’까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역사적 장소로 거듭난다. 15년 전 승민이 왜 자신을 밀어내는지도 모르는 채 첫사랑을 아프게 접어야 했던 서연은 자신이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제야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현재, 내 꿈과 내 결핍과 내 상처까지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승민은 ‘강남’ 출신의 선배 재욱과 서연의 관계를 의심한 나머지 서연을 밀쳐냈지만, 두 사람이 헤어진 진짜 이유는 어쩌면 ‘강남’ 출신의 선배를 향해 승민이 떨쳐버리지 못한 열패감이 아니었을까. 재욱이 술 취한 서연을 부축하여 서연의 집으로 들어간 날 밤, 승민이 ‘정릉’으로 간다는 이유로 ‘강남 택시 기사’에게 승차를 거부당하자 택시 기사와 치열하게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강남 압서방파’의 기에 짓눌린 ‘강북 키드’들의 집단적인 비애를 환기시킨다. 15년 동안 훌쩍 자라버린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강북’의 콤플렉스에도, 서울이 아닌 지방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유명한 교수에게 레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제주도 피아노 학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에 스스로 짓눌렸던 서연은 이제 제주도에서 편찮으신 아버지를 모시며 동네 아이들의 피아노 강습을 해주기로 한다. 고향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서울로, 중심으로, 상류층으로’ 가고 싶어했던 한 소녀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그녀는 고향에서 누구의 어깨에 기대지도 않은 채 자기만의 참된 시작을 경험하게 된다. 승민이 만들었다가 서연에 대한 오해 때문에 쓰레기장에 버렸던 미니어쳐 모델하우스는 서연이 15년 동안 간직하고 있음으로써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게 된다. 그것은 서연과 승민의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추억이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향한 두 사람만의 노스탤지아를 상징하는 사물로서 두 사람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어주는 영혼의 매개체였다. 두 사람이 이제 와서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첫사랑이었음을 마지막에 고백함으로써, 그리고 ‘첫 눈이 오면 우리 만나자’는 약속을 ‘함께’는 아니지만 ‘각자’ 지켰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관객은 그들이 공유했던 그 푸르른 청춘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승민이 서연의 집을 지어주지 않았더라면 서연은 지나간 상처를 누군가와 ‘함께’ 치유할 기회를 평생 가지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내 인생 리셋 좀 해 보려고. 고향에서의 새 출발, 멋있지?” 서연은 이제 ‘동네 피아노 선생님’이 얼마나 멋진 직업이 될 수 있는지, ‘대도시’가 아닌 ‘고향’에서의 새 출발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지닌 것인지를 깨달은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난다. 약혼자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간 승민이 원래 주인인 서연에게 돌려보내준 전람회의 CD는 그들이 함께 서툴게 만들어간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기억의 습작’을 이제 ‘지금 이 순간의 완성된 삶이라는 작품’으로 새롭게 부활하게 만든다. 그들의 ‘연애’는 실패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저 아름다운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끌어안은 ‘우리 둘이 함께 지은 집’ 속에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  
 
정여울, <사랑의 빈곤, 연애의 풍요를 넘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128-131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12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