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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 가까운 담백한 이야기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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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집 남자가 깡패라는 것을 알게 된 세진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피하려고 하지만, 그는 어느새 그녀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 그녀의 안부를 간접적으로 챙겨주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시끄러운 분식집에서 “라면 하나 주세요.”라는 문장 하나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문을 하는 그녀를 위해 동철은 분식집이 떠나갈 듯한 고함소리를 지른다. “야, 조용히들 못해!” 그녀가 만년 취업준비생이라는 것을 아는 동철은 이렇게 말한다. “불황이잖냐?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없다고 다 때려부수고 난리던데,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제 탓인 줄 알아요. 제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다 정부 탓인데 말이야. 당당하게 살어. 힘내, 씨바.” 별로 지적이지도 않고, 대단히 힘이 세지도 않은 것 같은 이 삼류건달의 기이한 위로가 홀로 객지 생활을 하는 세진에게 알 수 없는 힘이 되어주는 사이, 그녀에게는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그녀에게 취업을 시켜주겠다며 한 중소기업의 직원이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한 것이다. 세진에게 성상납을 요구한 직원을 혼내주고 자신도 경찰서에 잡혀 간 동철을 보며 세진은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이 사람이 깡패라는 사실이 기막히지만, 이 넓은 서울에서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동철임을 그녀 또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꿈 같은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 영 어색하다. 세진은 ‘건달과의 하룻밤’을 단지 지독한 외로움으로 인한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내버리기 위해 이렇게 말해준다. “에스키모 인들은 너무 추운 밤에는 혼자 자지 않고 개를 끌어안고 잔대요. 그래야 얼어 죽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추운 밤을 개의 밤이라고 한데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어제가 바로 개의 밤이었어요. 다신 그럴 일 없을 거라고요.” 동철은 세진의 결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를 자꾸만 놀려댄다. “그럼 내가 개라는 거야? 그럼 넌 개랑 한 거네.” 마음속에 정의감은 있는데 그 정의를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도 ‘깡패스러운’ 동철. 그를 바라보는 세진의 눈빛은 점점 경계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공감으로 바뀌어간다. 취직이 안 되면 고향으로 내려와서 결혼이나 하라는 보수적인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긴 세진은 동철을 가짜 신랑감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세진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어떻게든 ‘맡은 배역’에 충실하려 했던 그는 결국 자신이 건달이라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동네 깡패와의 싸움에 휘말려 세진의 믿음을 저버리고 만다. 세진이 ‘유일하게 믿었던 서울 사람 동철’에 대한 실망과 고난으로 점철된 서울 생활에 대한 좌절감으로 마지막 면접시험마저 포기한 채 고향에서 칩거하고 있을 때, 동철에게서 연락이 온다. 오늘이 마지막 면접 날이 아니냐고. 이 회사는 정말 너에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어떻게든 면접을 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어서 서울로 오라고. 동철은 자신의 신원을 숨긴 채 면접관들을 협박해 어떻게든 세진이 면접을 볼 수 있도록 버틴다. “제가 고등학교도 못 나왔어요.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기 싫더라구요. 맨날 싸움질만 하다보니까. 요 모양 요 꼴로 밑바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급기야 생전 처음 보는 면접관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한 아이가 있어요. 걔는 정말 나랑 다른 애예요. 그런데 가만히 있다간 걔가 나처럼 되겠더라구요.” 그 아이만은, 그녀만은 자신처럼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그의 간절한 기도가 통해 그녀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입사 면접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어엿한 회사원이 되어 ‘최연소 대리’로 승진한 세진의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철은 세진과 연락을 끊은 채 사라져버리고 만다. 한편, 뇌물을 먹고 경찰직에서 쫓겨난 박 반장을 제거할 임무를 맡은 동철은 자신이 박반장을 제거하고 나면 ‘신입’ 건달이 경찰서에 자수하는 식으로 짜여진 조직의 각본을 무시하고, 자신이 혼자 박반장을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어 조직의 안전을 꾀하는 건달세계의 익숙한 운영원리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살인을 할까’라는 관객의 걱정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는 박반장을 제거하러 갔다가 오히려 자신이 ‘제거’당하는 위기에 처하고 만다. 박반장의 칼에 찔린 동철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집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진을 생각한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거짓말처럼 첫눈이 내린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세진은 그토록 기다리던 그를 우연히 세차장에서 만난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건달 생활을 접고 건실하게 세차 일을 하며 가난하지만 떳떳하게 밥을 버는 동철의 눈빛에서 예전의 어두운 그늘은 사라지고 없다. 누구도 세진에게 ‘세상을 향한 길’을 내어주지 않고 있었을 때, 자신의 몸을 던져 ‘저 밝은 세상’을 향한 징검다리를 놓아준 ‘내 깡패 같은 애인’을 바라보는 세진의 눈은 오랜만에 햇살처럼 빛난다. 이 각박하고 황량한 서울에서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 내 깡패 같은 애인. 만년 취업준비생과 싸움 못하는 건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이렇게 ‘뜻밖에 가능한 현실’이 되어 신파적 멜로드라마나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담백한 이야기’로 거듭났다.  
 
정여울, <사랑의 빈곤, 연애의 풍요를 넘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133-136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13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