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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스와 인격적 자아실현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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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는 롯데와의 순수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자살한다. 그에게 사랑은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을 수 있는 최상의 관계였으며, 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삶의 의미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공/사의 이분법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 도시의 개인들은 사적인 관계에서만은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여기서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된다는 것은 교환가치나 효율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철학사에서의 “개인” 개념을 살펴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개인”은 그리스어 “원자atonom”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이 말은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지만 내적으로는 분할되지 않는 존재를 의미했다. 이렇게 볼 때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란 타자로부터의 분리(차이)와 자기 자신과 분리되지 않음(동일성)을 동시에 실현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근대 자본주의 도시에서 본격화되었던 로맨스는 사적인 영역에 배당되었던 이러한 인격적 개인의 이념을 성적 관계에 적용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로맨스는 사적인 관계에서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 역시 자유로운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이념에 충실한 것이었다. 만약 여성이 이제 사적인 영역에서만큼은 “개인”으로 인정된다면, 여성은 성적 관계 혹은 사랑 관계에서 자신을 공동체를 위해 교환되는 상품으로 꾸며서는 안 된다. 로맨스는 공동체 재생산을 위한 도구여서도 안 된다. 이런 것은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이념에 위반된다. 대신 로맨스 혹은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의 낭만적 만남에서 여성과 남성은 모두 각자의 자아실현을 욕망해야 한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니클라스 루만이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듯 근대 도시에서의 로맨스는 “인격적 개체성”, 즉 “타자와 분리되어 있지만 그 자신은 분할될 수 없음”을 실현하는 관계에 대한 욕망으로 등장한다. 물론 근대 자본주의 도시의 로맨스에서 재생산의 문제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결혼으로 이어지는 로맨스는 여전히 종의 재생산을 결과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으로 이어지는 로맨스는 남성 노동자를 재생산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도시의 “로맨스 정치경제”다.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로맨스가 재생산과 연관되는 한, 근대의 로맨스 정치경제는 이성애를 장려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등장하는 근대 가부장적 핵가족 로맨스는 여전히 근친상간 금기에 기반하며 그런 점에서 가부장적 남성경제가 구성했던 재생산을 위한 이성애 욕망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로맨스 정치경제에서 종의 재생산은 로맨스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가부장적 “남성경제”가 재생산의 도구로서의 여성을 교환함으로써 남성 종의 재생산을 굳건히 했다면, 자본주의 로맨스 정치경제는 여성을 인격적 주체로 만듦으로써 재생산을 덤으로 얻어간다. 자본주의 로맨스 정치경제학이 종의 재생산 대신 개인의 자아실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곳곳에서 증명된다. 우선 로맨스에서는 파트너의 유일무이성이나 대체불가능성이 자주 강조되는데 이것은 바로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개인성과 연관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기능을 대신해 줄 다른 의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로맨스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여기서 로맨스를 통해 타인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유일무이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유일성으로서의 개인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일하다는 것은 단지 수적인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정체성의 내용이 유일무이해서 다른 사람의 정체성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까지도 함축한다. 즉 로맨스 안에서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유일성과 대체불가능성을 욕망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혹은 나의 자아를 고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체 불가능한 그(녀)의 정체성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구분되는 서로의 유일성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왜 앤소니 기든스가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에서 로맨스를 “서사”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낭만적 사랑이 문학의 한 장르인 로맨스와 같은 이름을 갖는 것은 바로 낭만적 사랑이 서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맨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화되어 사회적 과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준거점도 가지지 않는 개인의 서사”일 뿐 아니라 “개인의 서사 안에 자아와 타자를 삽입하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낭만적 서사는 사회적 보편성으로부터 분리된 주체의 특이성뿐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는 두 사람이 전개하는 이야기의 특이성과 연관되어 있다. 낭만적 사랑의 서사는 나의 유일무이성의 가치를 알아보는 단 하나의 파트너와 매우 독특한 우리들만의 세계를 이루어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름 없던 나의 유일성을 일깨우는 운명적 사건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사랑은 내가 자아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데 핵심이 된다. 따라서 낭만적 서사는 그것이 유일무이하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다른 사람의 서사로 대체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격적 개체성을 존중받고자 하는 근대적 주체의 욕망이 된다. 뿐만 아니라 로맨스에서는 개인의 내적 통일성 실현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한 번 낭만적 서사의 구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로맨스를 중심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구성되는 두 사람의 자아 발전의 이야기다. 로맨스가 시작됨과 동시에 로맨스 주체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과거를 다시 쓰며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든스는 로맨스의 본성을 “개인적 삶을 미래시간의 식민화와 자기정체성의 구성에 관련시켜 조직하는 양식”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미래시간의 식민화란 미래를 현재의 사랑에 맞추어 통제하고 기획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로맨스를 통해 이루게 되는 로맨스 주체들의 정체성이 시간적으로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이며, 낭만적 서사의 사건들이 내적 통일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건은 두 사람의 로맨스 “중심”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자기발전의 과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로맨스 주체는 자신의 내적 통일성을 확보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로맨스 정치경제 안에서 상품이나 재생산 도구가 아닌 개인, 주체로서의 위상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인가? 남성경제에서 남성과 여성-처녀와의 관계가 재생산을 위한 도구적 이성애 관계였다면 근대 자본주의 로맨스 정치경제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아실현을 위한 이성애적 관계가 된다. 전자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다면 후자는 서로가 주인이 되는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맨스 정치경제는 남성경제를 완전히 해체시킨 것이 아닌가? 많은 여성들이 로맨스에 열광했던 이유는 낭만적 사랑을 통해서야 비로소 상품이나 도구로서의 모습을 벗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격적 개인으로서의 자아실현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남성 역시 근대적 로맨스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남성 역시 종의 재생산이나 자기 반영의 욕망을 벗어나 파트너를 또 다른 주체로 받아들일 때 자신 역시 진정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분명하게 지적하듯이 가부장적 “남성경제”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고 따라서 여기서 여성과 남성은 상호성에 실패한다. 노예에 의한 일방적 인정이 만족스러울 리 없다는 것이다. 여성교환을 통해 남성들은 여성을 자신의 자율성을 반영해 줄 거울로 만들었지만 이것은 곧 자율적인 남성들이 대상, 도구, 상품으로서의 여성의 반영에 의존하고 있다는 역설을 보여줄 뿐이었다. 앞서 이리가레가 분석한 남성경제에서 처녀의 위치는 “남자들의 관계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장소, 기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녀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뤼스 이리가레, 『하나이지 않은 성』) 다시 말해 “남성경제”에서 여성은 텅 빈 기호이다. 그렇다면 주인으로서의 남성이 이러한 여성의 위치에 의해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받는다는 사실은 모욕이 된다. 따라서 남성은 헤겔의 주노 변증법에 나오는 주인처럼 반성과 숙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세울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 해결방안은 로맨스 정치경제 속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남성은 적어도 사적인 영역에서 특히 낭만적 사랑 안에서만은 개체화된 혹은 주체로 선 여성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유일성과 통일성을 확인받게 되며 그 역시 동일한 것을 여성에게 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남성이 로맨스를 거부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이현재, <로맨스 정치경제학>,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215-220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215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