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이 반란했을 때 왕이 조서를 내리어 김부식과 임원애(任元敳)를 원수로 삼고 윤언이를 보좌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전자에 윤관이 왕의 명령을 받고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그것이 잘 되지 못했으므로 그의 문도(門徒)들이 왕에게 밀고하였다. 그래서 왕이 김부식을 시켜 그것을 다시 짓게 했는데 당시 윤관은 상부(相府)에 있었으니 예의 상 김부식이 일단 사양할 일이었으나 그러지 않고 그대로 짓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윤언이가 내심으로 분한을 품고 있었는데 하루는 왕이 국자감에 가서 김부식에게 주역(易)을 강의시키고 윤언이에게는 질문을 하게 하였다. 윤언이는 주역에 매우 정통하던 터이라, 이모 저모로 따지니 김부식이 대답하기 곤란하여 이마에 진땀을 흘린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윤언이가 김부식의 부하로 임명되니 김부식이 왕에게 고하기를 “윤언이는 정지상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으니 그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윤언이는 양주 방어(梁州防禦)로 강직되었다가 후에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었으나 윤언이가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억울한 것을 해명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