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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과 촛불 공동체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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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에 어느 국회의원이 그해 5월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를 가리켜 2400여 년 전 그리스의 ‘천민민주주의’와 같이 나라를 망치는 감정적 충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가리켜 ‘천민민주주의’라고 한 것도 터무니없지만 그 ‘천민민주주의’ 때문에 그리스가 망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비난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무지의 소치에 불과하다. 그런 무식한 국회의원들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망쳤기 때문에 촛불집회가 열렸고 그 촛불집회에서 대한민국 헌법 1조의 국민주권주의가 외쳐진 것은 민주주의의 참다운 모습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가 실현됐다고 볼 수 있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렇게 민주주의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국정의 모든 중요한 과제를 직접 처리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령 국민의 생명에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외국산 쇠고기를 멋대로 수입하는 정책을 정부가 채택한다면 국민이 그것을 무효로 하고 그것과 관련해 새로운 법과 정책을 만들 수 있었고, 이런 일이 참된 민주주의를 통해 당연히 실현됐다. 촛불집회는 바로 그런 민중집회, 즉 민회였다. 물론 고대 그리스와 달리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법이 그런 민중집회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법에서는 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결정은 정부만이 내릴 수 있고, 법은 국회가 제정하게 돼있다. 그러나 모든 법의 기본인 헌법, 그중에서도 기본인 헌법 1조를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조금만 논리적으로 해석한다면, 선거를 통해 정부와 국회를 구성하는 국민이 그 행정과 입법의 기능을 직접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직접 나서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헌법에 규정돼있지도 않은 서울의 지리적 위치를 거론하며 소위 관습헌법에 의해 서울을 수도라고 인정한 헌법재판소의 터무니없는, 지혜 아닌 지혜 같은 것을 빌릴 필요도 없이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당연히 인정할 헌법의 원리가 아닌가?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나 헌법재판관이란 자들은 삼척동자보다도 헌법을 잘 모른다. 2008년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 출처: 오마이뉴스 위에서 말한 국회의원과 유사한 소리를 한 철학자가 고대 그리스에 있었는데 그가 지금까지도 터무니없이 엄청나게 찬양되고 있다. 바로 독재철학자 플라톤이다. 당시 아테네에 살고 있었던 30만 명 정도의 사람들 가운데 노예, 외국인, 여성, 미성년자를 제외한 3만 명 정도의 성년남자, 농공상업에 종사한 그 3만 명 정도의 시민이 직접민주주의를 하는 것을 놓고 플라톤은 타락한 정치라고 욕하고 대신 철인독재를 주장했다. 물론 그는 노예, 외국인, 여성, 미성년자는 아예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까지 모두 국민으로 인정되는 지금 만약 플라톤이 살아있다면 과연 그는 무어라고 말할까? 이 정도의 유치한 독재론을 편 것만으로도 플라톤은 그 뒤로 2,400년 이상에 걸쳐 이어진 모든 독재의 철인으로 숭상되기에 충분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적어도 철학자들이 하는 철학이라는 고담준론에 걸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유치한 독재론이 인간의 혼을 구성하는 이성(철인), 기개(군인), 욕망(농공상)의 조화인 정의에 맞는 것이라고 대단히 철학적인 말로 그럴듯하게 합리화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복잡하고 난해하며 심오한 철학이라는 것을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계급사회가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는 진리라는 말과 같았다. 플라톤이 말한 정의란 그런 혼의 계급에 따라 철인(왕), 군인(사대부), 생산자(농공상)로 구분된 계급에 따라 평생을 사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하면 영혼의 진리와 사회의 진리가 일치하고 인간의 원리와 나라의 원리가 단번에 모두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철인왕이라고 자부하는 모든 독재자의 독재를 합리화, 정당화, 정통화한 플라톤이 2,400여 년 동안 서양을 지배해왔다. 그것은 적어도 민주주의의 시작과 함께 끝냈어야 할 가공할 반민주적 전통이 아닌가? 플라톤의 주장은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 이래 조선시대까지 사농공상이라는 신분계급 위에 군림했던 왕의 지배를 절대화하는 것과 똑같다. 고조선이나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어느 날 왕이 병들었을지도 모를 중국산 쇠고기를 먹으라고 백성에게 강요했는데 가장 천한 농공상인들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고 왕에게 너나 그것 많이 처먹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상황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왕이나 양반선비라는 이들이 그렇게 한 백성을 모두 잡아다가 죽이지 않았을까? 플라톤도 당연히 그런 농공상인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플라톤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나는 그런 우리의 왕이나 양반을 인정할 수 없는 동시에 그런 플라톤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플라톤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찬양되고 있다. 철학자들은 플라톤을 철학의 아버지로 숭상하지만 그는 독재철학의 아버지일 뿐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자유는 곧 방종이라고 하는 플라톤의 주장에 찬성하지도 않고, 철인독재의 본질이라고 하는 절제의 자유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자유일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민주주의의 자유가 방종으로 흐를 수도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논의를 굳이 플라톤의 반민주적인 ‘멋대로 자유론’에서 끌어올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플라톤은 자유 자체를 멋대로 죽이기 때문에 그의 반민주적인 자유를 자유라고 부를 수도 없다. 또한 나는 사농공상 계급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만인평등을 엄정하게 확보하는 것이 환상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에서 노예제와 신분제가 철폐되고 우리의 역사에서도 사농공상의 신분제와 노예제가 폐지된 지 겨우 1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신분제와 노예제를 옹호한 플라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 삼총사가 독재철학의 원조로 힘을 발휘해왔다. 그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에 맞지 않다. 따라서 사실상 그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우리까지 굳이 진리의 발견자랍시고 자처하는 그들에게 목을 매달 필요가 없다.  
 
박홍규, <슬픔의 공동체>,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14-218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14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