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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뿐인 삶의 가장자리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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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곳곳에 깃들어 있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며 애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개인에게 불명료하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죽음은 언제나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결코 산 자들의 경험적 인식 안에서 사유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타자성을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없을뿐더러 그 무엇도 확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타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외에도 우리는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대면하며 살아간다. 한 예를 들어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삶 자체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에게 죽음은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스러운 삶의 탈출구로 인식되며,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을 소멸시켜 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기대된다. 정용준의 소설집 <<가나>>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속해 있는 삶은 마치 암흑과도 같아서, 그 어떤 빛도 희망도 가능성도 감지되지 않는 곳이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는 결코 자신들이 바라는 인간다운 삶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삶의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소멸된 곳, 고통은 끝없이 지속되지만 달리 해결될 방안이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죽음을 갈망한다. 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새벽. 그 정지된 시간을 멀쩡한 정신으로 견디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절망스러운 포기만이 좁은 선실에 켜켜이 쌓여가는 나날이었다. ② 21은 문득 생각을 한다. 나는 불행한가? 또 생각을 한다. 나는 살고 싶은가? 21은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죽어버리면 통증과 감각이 분해될 것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 생각한다. 그런데 죽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걸까? ③ 그런데, 누나. 오블로모프는 죽을 때 어땠을까? 죽는 것이 슬펐을까? 아니면 이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했을까? 난 그것이 궁금해…… 어떤 죽음은 어떤 삶보다 차라리 행복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인물들의 말은 그들이 속해있는 삶에 대한 고통과 절망을 드러내는 극단적 표현이다. ①은 소설 「가나」의 일부분이다. 화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며, 인용한 부분은 죽음 이후 그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장면이다. 그에게 지나간 삶의 기억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것들뿐이다. 조상들의 관습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삼촌에게 빼앗기고 난 후 자신이 얻은 아내는 작고 여위었으며 벙어리인 여자였다. 그는 끊임없이 그녀를 미워했고 그녀를 향한 자신의 분노를 굳이 억누르지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도적떼가 마을에 침입하고 삶의 터전이 엉망이 되었을 때,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노래를 부르고 있는—아내를 향해 폭발하듯 모든 분노를 쏟아 붓는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는 그녀의 글을 읽는 순간, 마치 어떤 깨달음을 얻듯 그녀를 향해 심한 부끄러움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상처 입은 사랑이 시작되고, 어둠뿐이었던 그의 삶에는 ‘가족’이라는 조그마한 빛이 생겨난다. 그러나 삶은 그에게서 그 작은 빛마저 빼앗아 가버린다. 자급자족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마을에서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브로커와 함께 국경을 넘어야만 했던 것이다. 고기잡이 배 위에서의 순간들은 지루하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반복되는 권태감 속에서 그는 차라리 이런 삶보다는 죽음이 낫겠다고(①) 생각하기에 이른다. 희미한 빛이 생겨나면 곧바로 꺼져버리고 마는 어두운 삶 속에서, 인물들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작품 「벽」의 제목은 이러한 인물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은유로도 읽힌다. 「벽」의 배경인 염전은 인간성이 완전히 상실된 공간이다. 폭행과 죽음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사건으로 일어나는 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꾼들은 오로지 생존본능이라는 에너지를 동력 삼아 움직이는 낡은 기계처럼,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염전에서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묻거나 꿈꾸는 것은 부질없으며 어리석은 짓이다. 두려움과 무력감이 지배하는 땅에서 일꾼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존과 죽음 사이를 오갈 뿐이다. 그들의 삶(엄밀하게 말해 생존)은, 그들을 둘러싼 ‘벽’의 일부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지난하게 존속된다. 작품의 제목인 ‘벽’은 더 이상 도망칠 곳 없이 사회의 사각지대로 몰려버린 인물들의 상황을 나타냄과 동시에, 삶도 죽음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버려진 인물들을 지칭하는 구체적인 단어로 작품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일꾼들은 염전에서의 생활을 일정 기간 견뎌내고 나면 더 이상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다른 일꾼을 죽기 직전까지 때릴 것을 명령받으며, 그 명령을 통과하면 반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동료의 발길에 차여 죽음 직전의 상태에 이른 일꾼들, 마치 살아있는 시체와도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그들은 염전에서 ‘벽’이라고 불린다. 벽은 염전 도처에 널려있는 죽음을 지나가버린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가장 가까이 다가온 사건 그 자체로서 마주할 수 있게 해 준다. ②에서 일꾼 21은 염전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에 질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뒤이어 그는 바로 벽을 떠올린다. “침을 흘리고 동공이 풀린 채 죽음의 문턱에 선 노인처럼 소금밭 위에 서 있는 자신의 검고 마른 발등”을 상상한 순간, 그는 황급히 생각을 바꾼다. 헛생각은 안 된다고, 끝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벽」에 등장하는 일꾼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삶에 대한 갈망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벽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생존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벽은 일꾼들이 잠시라도 죽음을 갈망하는 것을 저지한다. 염전에서 일꾼들은 함부로 죽음을 꿈꿀 수도 없다. 그들은 오로지 기계처럼 일만 해야 한다. 염전 한 쪽 편에 검은 그림자처럼 붙박여 있는 벽은 바로 그러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해내는 장치인 것이다. 모든 인물들의 삶은, 「굿나잇, 오블로」에서 스끼가 누나인 오블로를 마지막으로 씻겨주며 하는 말(③)을 통해 명확하게 정리된다. 그들에게, 어떤 죽음(자신들이 꿈꾸는 죽음)은 차라리 어떤 삶(자신들의 삶)보다 더 나은 것일 수도 있다.  
 
류도향, 강애경, 정유미, <죽음의 세 가지 풍경>,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85-189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85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