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돈이 지배하는 사회, 나로 살 수 없는 삶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돈이 아니고는 삶을 논할 수 없는 시대다. 연봉은 얼마인지, 얼마짜리 자가용을 타고, 집은 몇평인지, 양적으로 측정되는 개인의 몸값이 곧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말해 준다. 돈은 어디까지나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획득하는 교환수단이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원하는 대상을 무엇이든 소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을 지배하는 최상위의 원칙이 되었다. 돈은 개별 사물들의 질적 측면들은 배제한 채, 모든 것을 양적 크기와 관계로 환원시키는 특징을 갖는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돈은 인간의 영혼과 인격적 관계맺음마저 마치 사물과 상품을 다루듯 계산 가능한 숫자로 환산하게 한다. 돈의 절대적 위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내용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게 만든다. 변영주 감독의 <화차>는 이런 망각이 만연한 사회를 접사의 거리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영화가 사회라는 비가시적 전체를 접사의 거리에서 담아내는 방법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어떤 개인의 삶을 최대한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 때문에 자기를 파괴해가는 주인공 ‘경선’의 개인적 진실에 접근할수록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낯설어진 우리사회의 진실을 보게 된다. 영화는 경선의 갑작스런 실종 장면에서 출발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경선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름도 지문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경선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삶을 지시하며,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그녀의 비밀스런 과거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를 마주하게 한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경선의 아버지는 IMF 시절 어려워진 회사사정으로 대출을 받게 되고, 대출을 돌려막다 불법사채를 쓰게 된다.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경선의 가족은 야반도주를 해 뿔뿔이 흩어진다. 술집으로 팔려간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실종되면서, 아버지의 빚은 홀로 고아원에 맡겨졌던 경선에게 상속된다. 그녀는 사채업자들의 횡포로 이혼을 당하고, 강제로 신체포기 각서에 인장을 찍은 후 술집으로 팔려가 사생아를 낳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기형이었던 아이가 죽자 그녀의 삶을 짓누르던 고통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다. 경선에게 그녀가 지고 있는 빚의 액수는 곧 그녀의 가치이자 존재의 의미다. 높은 금리의 빚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불어날수록, 그녀의 삶은 사람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결국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그녀를 자포자기의 상태로 내몬다. 그녀는 살인을 결심한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보복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막연하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살기 위해 지능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경선은 보호자와 가족이 없는 자신과 같은 연령대의 여자 선영을 죽이고 사체를 유기한 다음, 선영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서 살아간다. 경선은 선영의 이름으로 문호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이 꿈꿨던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경선이 사라진다. 청첩장을 전달하기 위해 문호의 집으로 향하던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그녀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선영에게 개인파산 기록이 있음을 알게 된 전화 통화 직후였다. 선영은 살해되기 전에 개인파산을 신청하고 면책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카드빚 35만원을 갚으려고 현금서비스를 받고, 현금서비스를 갚으려고 돈을 빌리고, 또 그 돈을 갚으려고 사채를 이용하면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그녀는 퇴근 이후 술집에 나가면서까지 신용불량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35만원에서 시작된 빚이 순식간에 8천만원을 넘으면서 결국 파산에 이른다. 행복한 삶을 위해 살해대상으로 선택한 선영이 자신과 똑같은 신용불량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선은 공포에 질린 채 허겁지겁 선영의 삶으로부터 도망친다. 경선은 자기를 포기하고 선영이 되지만, 선영 또한 자기를 포기한 또 한명의 경선일 뿐이었던 것이다. 경선이 선영에게서 도망친 이유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도 아니고, 첫 번째 결혼생활에서처럼 또 한번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그녀는 과거의 삶으로, 경선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선영의 모든 것을 버린 채 이름 없는 존재로 사라진다. 경선은 경선이라는 이름을 포기하는 대가로 행복한 인생을 찾는다. 그러나 그 행복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하다. 그녀의 삶 전체가 가짜가 된 것이다. 경선이 자기 이름을 포기한 것은 단순히 경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짜 자기로 살 수 없다는 것, 즉 가짜의 인격을 연기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사고가 정지되고 식욕에 몰입된 좀비처럼, 그녀는 껍데기뿐인 삶을 보존하는 데 자신을 내맡긴다. 그녀에게 선영의 삶과 선영이라는 사람을 통해 관계 맺어진 모든 것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그녀는 주변상황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심지어 사랑마저 기만하는 무감정의 존재가 된다. 돈이 아니고는 삶을 논할 수 없는 시대다. 연봉은 얼마인지, 얼마짜리 자가용을 타고, 집은 몇평인지, 양적으로 측정되는 개인의 몸값이 곧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말해 준다. 돈은 어디까지나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획득하는 교환수단이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원하는 대상을 무엇이든 소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을 지배하는 최상위의 원칙이 되었다. 돈은 개별 사물들의 질적 측면들은 배제한 채, 모든 것을 양적 크기와 관계로 환원시키는 특징을 갖는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돈은 인간의 영혼과 인격적 관계맺음마저 마치 사물과 상품을 다루듯 계산 가능한 숫자로 환산하게 한다. 돈의 절대적 위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내용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게 만든다. 변영주 감독의 <화차>는 이런 망각이 만연한 사회를 접사의 거리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영화가 사회라는 비가시적 전체를 접사의 거리에서 담아내는 방법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어떤 개인의 삶을 최대한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 때문에 자기를 파괴해가는 주인공 ‘경선’의 개인적 진실에 접근할수록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낯설어진 우리사회의 진실을 보게 된다. 영화는 경선의 갑작스런 실종 장면에서 출발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경선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름도 지문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경선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삶을 지시하며,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그녀의 비밀스런 과거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를 마주하게 한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경선의 아버지는 IMF 시절 어려워진 회사사정으로 대출을 받게 되고, 대출을 돌려막다 불법사채를 쓰게 된다.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경선의 가족은 야반도주를 해 뿔뿔이 흩어진다. 술집으로 팔려간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실종되면서, 아버지의 빚은 홀로 고아원에 맡겨졌던 경선에게 상속된다. 그녀는 사채업자들의 횡포로 이혼을 당하고, 강제로 신체포기 각서에 인장을 찍은 후 술집으로 팔려가 사생아를 낳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기형이었던 아이가 죽자 그녀의 삶을 짓누르던 고통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다. 경선에게 그녀가 지고 있는 빚의 액수는 곧 그녀의 가치이자 존재의 의미다. 높은 금리의 빚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불어날수록, 그녀의 삶은 사람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결국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그녀를 자포자기의 상태로 내몬다. 그녀는 살인을 결심한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보복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막연하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살기 위해 지능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경선은 보호자와 가족이 없는 자신과 같은 연령대의 여자 선영을 죽이고 사체를 유기한 다음, 선영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서 살아간다. 경선은 선영의 이름으로 문호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이 꿈꿨던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경선이 사라진다. 청첩장을 전달하기 위해 문호의 집으로 향하던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그녀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선영에게 개인파산 기록이 있음을 알게 된 전화 통화 직후였다. 선영은 살해되기 전에 개인파산을 신청하고 면책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카드빚 35만원을 갚으려고 현금서비스를 받고, 현금서비스를 갚으려고 돈을 빌리고, 또 그 돈을 갚으려고 사채를 이용하면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그녀는 퇴근 이후 술집에 나가면서까지 신용불량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35만원에서 시작된 빚이 순식간에 8천만원을 넘으면서 결국 파산에 이른다. 행복한 삶을 위해 살해대상으로 선택한 선영이 자신과 똑같은 신용불량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선은 공포에 질린 채 허겁지겁 선영의 삶으로부터 도망친다. 경선은 자기를 포기하고 선영이 되지만, 선영 또한 자기를 포기한 또 한명의 경선일 뿐이었던 것이다. 경선이 선영에게서 도망친 이유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도 아니고, 첫 번째 결혼생활에서처럼 또 한번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그녀는 과거의 삶으로, 경선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선영의 모든 것을 버린 채 이름 없는 존재로 사라진다. 경선은 경선이라는 이름을 포기하는 대가로 행복한 인생을 찾는다. 그러나 그 행복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하다. 그녀의 삶 전체가 가짜가 된 것이다. 경선이 자기 이름을 포기한 것은 단순히 경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짜 자기로 살 수 없다는 것, 즉 가짜의 인격을 연기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사고가 정지되고 식욕에 몰입된 좀비처럼, 그녀는 껍데기뿐인 삶을 보존하는 데 자신을 내맡긴다. 그녀에게 선영의 삶과 선영이라는 사람을 통해 관계 맺어진 모든 것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그녀는 주변상황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심지어 사랑마저 기만하는 무감정의 존재가 된다.  
 
류도향, 강애경, 정유미, <죽음의 세 가지 풍경>,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78-181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78페이지    E-BOOK 바로가기